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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강화도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였는데, 서기 400년 고구려대는 돌구현, 신라 때는 해주군, 서기 939년 고려 태조때 강화현으로 개칭되면서 강화라는 이름으로 불려졌으며, 강화군은 약 2만년전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를 비롯하여 단군신화의 유적인 삼랑성과 참성단 그리고 서기 1232년 6월 고종때 몽고와의 항전을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후 1270년 5월 고려 원종 11년 귀경하기까지 39년간 7차례 걸친 몽고군의 끈질긴 침략에도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항쟁을 계속하면서도, 고려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 및 금속활자, 고려자기 등 찬란한 민족 문화의 꽃을 피웠던 유적지입니다.

1627년 인조 5년 정묘호란과 1637년 병자호란시 피난 수도였고 경기, 황해, 충남의 3도 수군 본부였다. 5개의 진 7개의 보 9개의 포대 53개의 돈대 8개의 봉화대가 구축되어 강화전체가 천연 요새인 동시에 수도 방위의 전초 기지였다.

이조 말기 대원군의 쇄국정치와 천주교 탄압으로 빚어진 프랑스함대 침입 사건의 병인양요와 미국의 통상요구가 발단인 신미양요가 일어났으며 1875년 운양호사건으로 말미암아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한일 수호조약이 체결되어, 36년간 나라를 빼앗긴 시발지가 되었다.

강화도의 면적은 421.4㎢이며 인구 약 10만 명, 행정구역 1읍 12면 1출장소 159개 리이며, 26개의 섬으로 이루어 졌다.

특산물은 화문석, 인삼, 새우, 꽃게 등이 많이 나며 12개 사찰과 226점의 문화재를 간직한 역사의 고장입니다.

 

강화대교

694m의 강화대교는 1970년 1월 26일 개통됐다.

 

갑곶돈대(강화읍 갑곶리)

고려가 1232년부터 39년간 강화도에 도읍을 옮겨, 줄기찬 항전을 계속할 때 이곳은 외성으로 강화 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였다. 1656년 강화에 여러 진이 설치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이룩되었다.

갑곶돈에는 대포 8문을 설치하였으며, 1866년 9월 7일 병인양요때 로즈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연합 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상륙하여 강화성, 문수성 등을 점령하였으나, 10월 3일 양현수 장군이 거느린 용맹한 조선군의 습격을 받아 10월 13일 패주하고 말았다.

이곳은 옛 강화의 관문이며 한강을 지키는 중요한 보첩이다. 돈대 내에는 조선시대 대포가 전시되고 있으며, 1976년 대통령의 분부로 돈대가 복원되었다.

 

용흥궁 (강화읍 관청리)

조선 25대 철종 임금이 왕이 되기 전 살던 3간의 초라한 집이었는데 1849년 왕이 되자 용흥궁으로 불렸으며, 1853년 강화 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다시 지었다.

 

강화도령 철종

1849년 6월 조선 24대 헌종 임금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원대비 김씨는 대신들을 모아놓고 영조의 혈맥은 원범이  뿐이니, 원범으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때 원범의 나이 19살 시골총각이었다. 부사 정원용이 보영 대신이 되어 강화도로 건너와, 덕온군으로 봉해진 원범을 모셔왔고, 6월 4일 인정전에서 즉위를 하니 그가 곧 강화도령 철종 임금이다.

어릴 때 부친이 죽어 형편없이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왕이 되니 궁중예절을 몰라 실수를 자주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즉위 3년만에 친정을 하였지만 명분뿐이었고, 안동 김씨에게 정치 실권이 다 넘어 갔다.

이런 형편이니 허수아비 임금이 철종이 할 일이란 술을 마시고, 아름다운 후궁을 탐닉하는 일 뿐이었다. 임금이 된지 13년만에 병을 얻어 승하하시니 그의 춘추 32살이었으며 서기 1863년이었다.

【전설】

철종 임금과 금도사

철종은 왕가인 자손이란 것을 전혀 모르고, 19세에 등극할 때까지 원범이라는 이름의 천민이었으며, 그때 나무하러 다니며 놀던 양순 이라는 아가씨와 금씨 성을 가진 친구와 퍽 정답게 놀았다.

원범이 왕이 되어 갑자기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헤어지기 싫어 슬피 울면서 금씨 친구가 원범 이에게, 원범아 어디를 가느냐 왜 가느냐 물었다. 철종은 그 사연을 설명할 수 없어 그냥 이런 말만 하고 갔다.

이다음에 서울에 놀러오거든 제일 큰집을 찾아 오라, 얼마 후 금씨 총각은 원범 이를 만나러 서울 대궐을 찾았다. 원범 이가 강화도에 서 살 때 좋아하던 개 한 마리를 메었으니, 그 꼴이 말이 아니라 대궐의 문지기가 통과시킬 리가 없었다.

마침 철종이 행차하다 이 모양을 보고, 즉시 신하를 시켜 불러들 이라 하니 벼슬이 없는 천민은 입궐이 안 된다 하였다. 생각다 못한 철종은 금씨에게 벼락감투를 씌우는데, 벼슬이름이 도사였다.

철종은 친구인 금도사에게 양순 이의 소식도 물으며 후한 대접을 하고 모내면서, 강화유수에게 명하여 금도사가 달라는 대로 농토를 주라고 명했다. 금도사는 자기집 뒷산에 올라가, 보이는 땅을 몽땅 달라고 해서 얻은 농토로 일약 부지가 되었고 감투까지 쓰게 되었으며, 지금도 금도사의 후손들이 강화면 옥림리에 살고 있다.

 

김상용 선생 순의비

이 비는 1636년 병자호란때 우의정이었던, 우의장이었던, 김 상용 선생이 묘사를 지내고 강화에 있다가 1637년 청군의 침입으로 강화 성이 함락되자, 강화성 남문에 화서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하였다. 1968년 김 상용 선생의 후손인 김 창국이 남문 터에 비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글씨가 마멸되자, 1834년 선생의 후손인 강화유수 김매순이 원비와 같이 다시 새겨서 새 비를 새우고, 옛 비를 새 비의 밑에 묻었던 것인데 1976년 11월 23일 고려 궁터 진입로 확장공사 때, 비각을 옮기면서 땅에 묻힌 원 비가 출토되었다. 원 비의 큰 글씨는 전자체이고, 비문은 해서체로서 아주 잘 쓴 글씨이다. 현재 이 비각에는 1968년에 세운 원 비와, 1834년 다시 새겨 세운 비가 함께 용흥궁으로 들어가는 길옆에 서 있다.

 

고려궁터(사적 133호)

고려 궁터는 고려가 몽고의 침략으로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든 고려 무인의 용기 있는 주장을 따라 천연의 요새인 강화에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궁궐의 규모가 완성된 것은 1234년이었다. 1270년 개성으로 환도 후에 궁궐과 성은 무너지고, 그후 고려 궁터에는 강화 유수부의 건물이 들어서, 이방청과 동헌이 남아있으며, 궁궐터에는 옛 기와 쪽과 축대만이 남아 쓸쓸하였던 것을, 고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 자주정신과 호국기상이 깃든 유적이니 잘 보전 정화하라는 지시에 따라 1977년 보수 정화되었다.

 

강화동종(보물 11호)

높이가 186.5㎝ 밑지름이 141㎝ 두께가 15㎝의 큰 종이며, 조선시대에는 강화성문을 여는 시간과 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타종하였으며, 종에 새겨진 글씨에 의하면 서기 1711년 숙종임금때 만들어졌고, 원래 김 상용 선생 비각 자리에 있던 것을 1977년 고려 궁터로 옮겨 보전하였다.

북문 휴전선 넘어 장단과, 개성의 송악산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으며 원래 북문에는 문루가 없었는데, 1783년 성을 개축하면서 문루를 세우고 진송구란 현판을 걸었으나. 그 후 무너지고 없었던 것을 1977년 다시 세웠으며, 성문을 지나 100m쯤 오솔길을 걸어가면 약수가 있다.  

 

강화성

1232년 축성하여, 39년간 줄기차게 항전한 도성이었다.

1259년 고려가 개성으로 환도하지전 성을 헐었고, 조선초기에 보수되었고 1637년 병자호란으로 파괴되었다가 조선 숙종때 크게 개축되었으며 남에는 안파루 서에는 첨화루, 동에는 망한루, 북에는 진송루의 4대문이 있었고, 서문과 동문 옆에 수문이 있었다.

 

강화 지석묘 (사적 137호)

강화군 하점면 부근에는 30 여기의 지석묘가 흩어져 있다. 중부 지방에서는 드물게 보는 거대한 북방식 지석묘로서, 길이가 7m10㎝ 너비가 5m50㎝높이가 2m60㎝나 되고, 학술적으로 선사시대의 연구자료에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덕진진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강화 해협을 지키는 회서의 요충지이며, 1677년 만 호로 격상하여 만호 1명 군관 26명 사병100명 대포 10문 배 2척이 배치되었으며, 서기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 장군의 부대가 이진을 통하여 정족산에 들어가, 프랑스군을 대파하여 승첩을 이루었고, 서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극동함대와 치열한 포격 전을 벌였으나 사정거리가 짧고, 정조준이 안돼는 대포라 미국함대는 신식 대포의 사격에 밀려 패하였다. 그러나 미국 함대도 큰 피해를 당했으며, 당시 미군 전기 속에 조선군의 대포소리가 얼마나 크고 용감한지, 남북 전쟁 때도 짧은 시간에 이만큼 맹렬한 포격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기록하였다 한다.

 

광성보 사적 227호(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고려 시대에 축성한 외성을 서기 1618년 조선 광해군 때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매치 인원과 장비는 별장 1명과 군관 29명 사명 100명 돈군 18명, 군량미 114석 콩 20석 첨향미 103석 간장 4독 배 5척 이었으며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된 것은 1745년이었고, 이때 안해루란 성문이 설치되었다.

신미양요때 가장 격렬한 격전지로서, 미국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아세아함대가 1,230명으로 침공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에 이르니 어재연 장군이하 전 병사가 용감히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창과 칼로 맞서 싸우고, 그것도 떨어지면 맨주먹을 싸워, 한사람도 물러서지 안고 장렬하게 모두 전사하였다.

이대 미군은 미국 육군사관하교 출신으로는 첫 전사자인 맥키 중위를 비롯하여 3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하였으며, 조선군의 용감한 군인 정신에 놀라 48시간만에 퇴각함으로서 한, 미전이 끝이 났으며 당시 미군의 병기는 9인치, 8인치 포 85문의 대포였고, 조선군의 병기는 정조준이 안되는 대포와 소포 약간이었다고 하니, 우리는 그들의 군인 정신을 본받아야 되겠다.

 

신미 순의 총

광성보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1871년 신미양요때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신 이름 없는 용사들의 무덤이다.

1976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정성 들여 정화하였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고개 숙여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드려야 하겠다.

 

용두돈대

좁은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 위에 설치된, 천연적인 교두보로 요즈음의 발달된 무기로 무장되었다면 작은 보트 하나 그냥 통과할 수 없는 절묘한 지형의 돈대이다.

 

손들목

손들목은 강화도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물목을 가리키는 속칭인데, 용두돈대 앞 수로를 말한다.

고려 21대 희종 임금이 몽고 난을 피해 자연도로 길을 재촉할 때, 갑곶수로를 빠져 광성보앞 수로를 통과하게 되었다. 험한 물살을 헤치고, 배가 나가는데, 희종은 우연히 주위를 돌아보고, 아무리 보아도 확 터진 바다가 보이지 않고 뱃길이 막힌 곳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다.

희종은 뱃사공이 자기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크게 노하여 사공의 목을 베게 하니, 죽기 전에 표주박 하나를 물에 띄우며 임금님 저 표주박을 따라가시면 안전한 곳으로 가게됩니다. 하고 사공은 죽었다.

과연 표주박을 따라 얼마나 흐르고 나니 목적지에 닿았다. 왕은 오해를 하여 사공을 죽인 것을 크게 후회하며 사공의 장례를 잘 지내게 하고 그의 묘를, 지금의 용두돈대 건너편 양지바른 곳에 마련하니, 이 물목을 그대부터 사공의 이름, 손돌을 따서 손돌목이라 한다.

 

어씨설화

옛날 어느 바닷가에 고리를 잡는 가난한 어부 총각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하루는 하루종일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못 잡고, 마지막으로 그물을 던졌는데 묵직한 것이 걸려, 오려보니 위는 아름다운 아가씨고 아래는 고기라 그야말로 인어아가씨였다.

노총각은 인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건너 방에 내려놓았으나 너무 예쁜 인어 아가씨에 반한 노총각이, 그만 하룻밤 사랑을 맺고 말았다. 그 다음날, 날이 새어 인어 아가씨, 눈물로 애원을 한다. 나는 용궁의 공주인데 갑갑하여 물가에 나왔다가 당신의 그물에 걸렸으니, 나를 다시 바다에 놓아줄 것을 애원하였다. 마음이 약한 노총각이 인어를 바다에 놓아주니 인어아가씨 하는 말이 내년 이때 이 시간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였다. 세월이 흘러 1년 후 노총각이 약속한 장소에 나오니, 과연 그 인어가 무엇을 안고 왔는데, 인어 하는 말,  당신과 하룻밤의 사랑이 씨가 되어 아기가 태어났으니 아기를 돌려드립니다. 훌륭하게 될 아이니 잘 키우십시오 하면서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자라면서 아이는 ,영리하고 슬기로워, 총각은 인어가 낳은 아이라고 성씨를 고기 어자 어씨로 정하고, 훌륭하게 키워 나라에 큰 인물이 되었다. 광성보에서 미군을 맞아 장렬히 전사한 어재현, 어재순 형제도 그 후손인가 한다.

 

초지진 (사적 225호)

1656년 진이 설치되고, 1679년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이 축조되어 이진에 소속되었다. 1763년에는 첨사가 있었고,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에 배가 3척 배치되었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아세아 함대가 1,230명으로 침공할 때, 킴벌리 중령이 이끄는 2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였으며, 1875년 일본의 군함 운양호가 처지진의 포대와 격렬한 포격 전을 벌였으며 이 사건이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화되었다.

 

강화인삼

고려 인삼으로 불리는 강화인삼은, 6·25동란 때 피난 온 개성 사람들이 인삼 씨를 가져와 재배하면서부터 시초가 되어, 지금은 강화도의 특산품으로 농가 소득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모양이 사람 모습에 가까울수록 상품으로 친다.

 

삼랑성 (사적 130호)

정족 산성이라고도 하며, 성내에는 유명한 전등사가 있고, 단군의 세 아들이 축성했다는 전설로 삼랑성이라 한다.

성곽 둘레는 2㎞ 미만이며 높이는 약 2m로부터, 5m나 되는 석성으로 축성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시대 이전의 축성인 것만은 확실하며, 4개의 성문이 있었고, 서기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 장군이 지휘하는 370명의 병사가 프랑스군 올리비 대령이 이끄는, 160명의 해병을 이성에서 기습 격멸하였다.

 

전등사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삼랑성 내, 아늑한 곳에 자리잡은 이 절은,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에 아도 화상이 창건하여 진종사라 불렸는데, 고려 충렬왕 8년 정화공주가 이 절에 옥등잔을 부처님께 바친 데서, 전등사라는 이름이 생겼다 한다.

경내에는 대웅전(보물 178호), 약사전(보물 179호), 범종9보물 393호), 등이 있으며, 특히 대웅전 내에 귀중한 법화경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이 경판은 원래 105매였으나 6·25동란 당시 파주 모 부대에서 가져가 분실 되였으며, 이 경판은 조선 중종(1544년)때 개판 되어 정수사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 어느 대인가 전등사로 옮겨 보관된 것으로 보인다.

 

범종 (보물 393호)

이 종은 높이가 163㎝ 밑지름 100㎝인 중국 송나라 종이다.

종에 새겨진 글씨에 의하면 이 종은 북송 철종 소성 4년 즉 서기 1097년에 제작되어,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에 있었던 종인데, 어찌하여 전등사로 옮겨왔는지 알 수 없으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답다.

일제시대 금속류 강제 공출로 빼앗겼다가, 해방 후 부평 군기 창에서 다시 찾아왔다. 하마터면 그들의 만행으로 소실될뻔 하였으나, 부가의 신물이라 불보살의 가호를 받아 본래의 장소로 옮겨진  것이다.

 

【대웅전 나녀상의 전설】

대웅전 건립의 도편수가 공사 중에 우연히 마을의 어느 여인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 깊은 사랑에 빠져 공사 중에도 틈틈이 그 여인을 만나 사랑을 속삭여 왔다. 그리하여 노임을 받는, 그대마다 그 여인에게 모두 갖다 주었다. 그러던 중 세월이 흘러, 대웅전 불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으르게 되었고, 건물만 완공되면 도편수는 마을의 그 여인과 오붓하게 새 살림을 차릴 각오가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여인은 마음이 변해 다른 남자와, 도편수가 모아준 돈을 가지고 멀리 도망을 가버렸다. 사랑에 실망한 도편수는 살맛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고 법당을 짖기 시작했는데, 지난날의 그 사랑이 증오로 변해 법당의 기둥 위에, 그 여인의 모습을 조각해 넣고, 무거운 지붕을 받들게 했다. 이렇게 도편수는 자기를 배신한 그 여인에게 법당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고통을 줌으로써, 수 백년동안 내려오면서 배신한 여인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라 한다.

 

공순 영릉

공릉은 예종의 원비 장순 왕후의 능이다. 세종 27년 한 명화의 달로 태어나, 세조 6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인성군을 낳고 이듬해 17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하였다.

정조 임금이 즉위하여 왕으로 추존하고 1908년 순종 2년에 황제로 추존되었다.

 

장릉

조선 16대 인조 임금과, 그의 비 인렬왕후의 능이다. 인조는 선조 임금의 5째 왕자로서, 광해군의 폭정으로 김류, 이귀 등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정묘호란을 겪었고, 삼전도에서 청재종에게 굴복, 두 왕자를 인질로 청나라에 보내는 수모를 겪었으며 재위 27년, 55세로 승하하였다. 인렬 황후 한씨는 한준겸의 딸로서 1610년 능양군과 가례를 올려, 인조임금의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어, 효종과 소현세자 등 4형제를 두고 42세로 승하하였다.

 

율곡 선생의 묘 (파주군 천현면 동문리)

율곡 이이는 조선 중종 31년 강릉 외가에서 출생,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하였고,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셨으며 임진왜란을 예견하시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 학문으로는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루었고 선조 17년(1584년) 49세로 별세하였다.

 

화석정 (파주군 파경면 율곡리)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는 강변에 위치하였으며, 고려의 대 유락자 길재의 유지라 전하고 있으며, 율곡 선생의 선조인 이명신이 정자를 지었고,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으며, 율곡 선생이 중수하였다. 율곡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제자들과 시와 학문을 논했다 한다. 이 정자는 6·25때 불타 1966년 복원되었다. 율곡 선생께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당파싸움으로 이뤄지지 않아 관직을 그만두고 이곳 파주에 와서 제자들과 지낼 때, 틈만 있으면 임진강 나루 화석정 기둥에 소나무 관솔 기름을 발랐다. 사람들은 벼슬을 그만두니 돌았다고 말을 했지만, 계속하여 그 일을 반복하였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 임금이 피난길을 떠났는데 비는 억수같이 오고 날은 저물어 임진강에 도착하니 배를 타고 건너야 되겠는데 칠흑같이 어두워 불가능하였다. 이때 율곡 선생의 제자들이 정자에 불을 붙이니, 관솔 기름을 잔뜩 바른 정자는 빗속에서도 잘 타, 강 건너까지 환하게 만들었다. 무사히 강을 건너온 선조 임금께서, 그대 율곡 말을 듣고 10만 군사를 길렀더라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텐데 하면서 후회하셨다 하며 율곡의 선견지명에 놀랐다 한다.

 

육탄 10용사탑 공원

송악산 비둘기 고지에 포탄을 안고 토치카를 부셔 고지를 점령하고 용감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육탄 10용사 비이며, 김 만술 소위는 1개 소대 병력으로 중공군 2개 대대를 섬멸, 한국 최초로 태극 무공 훈장을 받으셨고, 미국 최고 훈장을 받으셨다.

 

통일로

통일을 염원하여 이름 붙여졌으며 1971년 12월 완공을 본 서울에서 자유의 다리까지 43㎞의 길이다.

 

자유의 다리 (파주군 문산읍 마정리)

원래는 부산에서 신의주가지 철마가 달리던 임진강 철교였으나, 6·25사변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53년 휴전이 되어 12,773명의 포로 교환을 위해 급히 가설된 길이 83m 폭 6m 높이 20m의 조그만 다리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유의 다리이다. 임진강 철교를 건너 평양 신의주가지 달리던 철마는, 1953년 7월 27일 중단되었으며, 임진강에서 신의주까지는 444㎞, 평양까지는 208㎞이나 언제 철마가 저 철길을 달려가려는지···

 

제3땅굴

1978년 10월 17일 발견되었으며 판문점 미군 기지 캠프기지로부터 불과 2㎞ 서울에서 45분 거리이며, 지하 73m 암석층을 파 우리측 435㎞까지 침범하였으며, 규모는 2땅굴과 비슷하여 한시간에 중무장한 병력 3만 명이 통과할 수 있으며, 유사시에 남쪽 출구 5개를 통해 빠른 시간에 우리의 수도를 침범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의정부

1910년 양주군 서북면과 둔아면이 합쳐 서둔면이 되고, 1942년 의정부 읍이 되고 1963년 시로 승격, 주변에 도봉산(717m)이 있으며,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은 임금이 되기 위해 동생도 죽이고 정도전 등을 죽이자, 화가난 태조 이성계는 함흥으로 가 버렸다. 임금이 된 태종은 옥새도 물려받고, 태조를 궁에 모시기 위해 문안사를 모내 돌아올 것을 간곡히 청하였지만, 보내는 문안사마다 활을 쏘아 죽이니 한사람도 돌아올 수가 없었다. 후에 함흥차사란 말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 뒤, 태조의 화가 어느 정도 풀리어 지금의 의정부가지만 돌아왔다. 내종이 부왕인 재조를 맞으러 교외에 천막을 설치할 때, 하륜이 태종께 태조의 화가 덜 풀리어 무슨 번이 있을지 모르니 기둥을 큰 나무로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기둥을 아름드리 나무로 여러 개 세웠다. 태조가 이 광경을 보고 옥새를 땅에 던지며, 여기 있다. 네가 욕심 내는 것이니 가져가거라 했다. 태종이 옥새를 받고 잔치를 열려할 때, 또 하륜이 귓속말로 헌수할 때 친히 잔을 올리지 말고 중관을 통해 올리라고 했다. 하륜의 말대로 중관을 시켜 술잔을 올리니 태조가 술을 받아 마신 후 소매석에서 철의주를 꺼내 보이며, 태종이 가까이 모면 내려칠 생각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후에도 태조는 끝내 궁궐에는 가지 않고, 지금의 의정부에 머무니 각 대신들이 이곳에 와, 정무를 의논하고 결재를 받아갔음으로, 이곳을 의정부라 부르게 되었다.

 

양주군 천보산 회암사

고려 충숙왕때(1328년) 지공대사가, 인도의 아라난타사를 본 따 창건한 절이다. 무학대사가 중건하였고, 조선 태조와 효령대군이 수도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전국 사찰의 총 본산이었으며, 승려가 3,000명에 달했다. 조선시대, 중종비 문정 왕후의 신임을 얻은 보우대사에 의해 한때 사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사약을 받고 죽으니 절은 폐사가 되었다. 지금의 절은 절터에서 500m 올라가면, 희암사 부속암자가 있던 곳에 1821년 주변에 흩어진 유적 유물들을 모아 재건, 1977년에 지은 대웅전과 영성각, 삼성각 등이 있으며 영성각에는 무학대사 진영을 모셔놓아, 많은 참배 객이 모인다. 사찰 내에는 선각 왕사비 보물 387호 무학대사의 부도 보물 388호 사사자석등 보물 389호 등이 있다.

 

해유령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

임진 왜란때 부원수 신락에 의해, 최초의 승리를 거둔 곳이 이 고개이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77년 화강암으로 높이 10.6m의 탑을 세웠다. 선조 25년(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달포도 넘지 않아 왜적은 한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으로 공격해 오 때, 부원수 신라장군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이곳에서 적 선봉부대를 쳐서, 적 70명을 죽이므로 승리를 하고 적의기세를 꺾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당시 한강 방어를 맡았던, 도원수 김명원은 방어선이 무너지자 임진강으로 달아났으나, 김명원은 패전 책임을 부원수에게 미루고, 명령에 따르지 않고 딴 곳으로 도망갔다고 허위 보고해, 이 무고로 신락 장군은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처형명령을 내린 뒤 승리의 소식이 전해와 왕은 형 집행정지를 명령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신락 장군은 구국의 한을 품은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릉 (양주군 진건면 사릉리)

숙부에게 왕위를 뺏긴 단종 임금의 왕비로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가자 궁을 나와 서울 동쪽 교외에 살면서 영월의 단종 능을 바라보기 소원하여, 초가집에 소복하고 소찬으로 사시다가 82세에 돌아가시니, 중종 임금은 대군 부인의 예로 장례 지내게 했고 숙종 24년 단종이 복위됨과 함께 정순 왕후로 추상되고 묘를 능으로 높여 부르게 되었다.

 

양주 별산대 놀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지방에서 이어오는 가면국인, 산대도감극의 한 분파로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덕담과 재담이 곁들여 진다.

4월 8일, 5월 단오, 6월 유두, 7월 백중 등의 대소 명절에 연회 되며, 밤 10시쯤 시작되어 다음날 새벽가지 계속되고 무형 문화재 2호로 지정되었다.

 

광릉 (남양주군 주접면 부평리)

조선 7대 세조 임금과 왕비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세조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카인 단종 임금을 몰아내고 와위에 올랐으나, 1468년 52세로 승하하기까지 재위 14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땅의 고저를 측량하는 인지의를 발명하였으며, 경국대전을 편찬하였고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경내에는 천연 기념물 11호로 지정된 크낙새 등이 서식하며 임업 시험장의 나무들이 인근 노목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봉선사 (남양주군 주접면 부평리)

조선 8대 예종 1년(1468년) 선왕인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고 그 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임진란과 병자호란으로 불탄 것을, 1637년 게민선사가 중건, 명종 17년 교종 본산으로 봉하였고 고종은 다시 31본산으로 승격, 6·25로 본전을 비롯 많은 건물이 불탔는데, 1970년 세운 큰 법당은 현대식으로 지었고 큰 법당 현판을 한글로 써서 이색적이며,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있으며, 봉선사 종은 국보 397호로 지정되어있다.

 

금곡릉 (남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흥릉과 유릉을 말하는데, 흥릉은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의 능이며, 유릉은 순종과 순종이 왕세자 시절 돌아가신 순명 왕후로 추존된 민씨와, 순정효왕후 윤씨의 삼릉이다.

흥릉 : 대원군 흥성 이하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철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고종은,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 개화기의 시련 속에 1919년 일본인들에게 독살되었으며, 민씨는 왕비로 간택된 뒤에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대결, 친정 민씨의 세력을 조정에 뿌리 박게 하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여걸이었으나 역시 일본인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유릉 : 고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임금이 되었다. 4년만에 일제의 침략으로 망국의 황제가 된 순조의 능이며, 순명왕후 민씨와 순정효황후 윤씨의 삼릉을 말한다.

 

산정호수 (포천군 영북면 산정리)

포천군 영북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 영북면 토지개량 조합 저수지로 개축되었는데, 호수 뒤편 명성산과 주변 산들의 봉우리가 호수에 비치면 경치가 아름다워 관광지로 발전했으며, 주위에는 운천사, 자인사, 비선 폭포 등이 있으며, 만수 면적이 7만8천 평 최고 수심이 23m나 된다.

 

청평유원지

북한강의 중류를 막아 1937년 일본인에 의해 저수지로 만든 이후 1943년 3월 완공되었으며, 수력발전으로 하루 약 3만㎾를 발전 우리 나라 댐 중 가장 오래 되었고, 강 양편에 솟아있는 산골짜기를 흐르는 물가에 피는 철쭉, 진달래가 아름다우며 낚시, 수상스키 등이 마련되어 있다.

 

등선폭포

삼학산 중턱에 있는 5개의 폭포로서 높이가 14m이다.

등선폭포에서 약 2㎞ 정도 올라가면 흥국사라는 절이 있는데, 옛날에는 수백 병의 승려가 있어 쌀 씻은 물이 폭포까지 흘러 부옇게 흐렸다 고하며, 약 400년 전 신선이 하늘로 승천했다하여 등선폭포라 부른다.

 

출렁다리 (등선교)

교각이 2개로 남해대교와 같은 형식으로 국내 최초의 클라이식형 출렁다리이며, 툰성군 서면과 강촌을 잇는 다리로서 길이 277m 높이가 3.4m 폭 3.4m이고 1972년 12월 29일 준공되었다.

 

남이섬 (춘성군 남면 방하리)

북한강 상류에 있는 섬으로서, 둘레가 약 6㎞ 약 14만평의 면적에 수많은 포플러, 밤나무, 정원수가 어울려, 가을엔 단풍과 더불어 매년 밤 줍기 대화도 열리며 남이 장군의 묘소가 있다하여 남이 섬이라 부른다.

 

남이 장군

1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20세부터 많은 싸움에 큰공을 세우고 25세대 야인 족을 정벌하고 돌아오며 백두산 돌을 모두 칼로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모두 말이 먹어 없애도, 남자 20에 큰일 한번하지 못하면, 대장부라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시를 읊었으며, 병조 판서 때 밤하늘에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라 혼자 말처럼 하였는데, 유자광이 이를 듣고 모함하여 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였다. 후에 예종 임금이 모든 사실을 알게되어, 애석하게 생각하며 큰 벼슬을 내려 주었다.

 

서삼릉

통일로를 따라 문산 쪽으로 약 4㎞쯤 가다가 원당읍 쪽으로 2㎞쯤 가면 왼쪽으로 서삼릉이 있는데, 서삼릉이란

희릉과 효릉과 예릉을 서삼릉이라 부른다

희릉 : 중종의 계비 자경 왕후 윤씨의 능으로 중종 22년  경기도 광주에서 이곳으로 이장.

효릉 : 중종의 아들 인종의 능으로 명종 원년(1546년) 이곳에 모셨으며 그의 비 인성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1577년 함께 모셨다.

예릉 : 조선 25대 강화도령 철종의 능이다. 그의 왕비 철인 왕후 김씨도 1878년 함께 모셔 쌍릉으로 쓰여졌다.

 

행주산성 (고양군 지도면 행주내리)

행주산성은 그리 높은 성은 아니지만, 덕양산(해발  124m)의 천연적인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요새지로서,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장군은 배고개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12월에는 수원에서 왜적을 무찌른 후 승장 처영 장군 등 정병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가을 건너 덕양산에 진을 구축,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 왜군 총수 우끼다는 3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쓴 우리 병사들의 필사의 항전으로, 적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으며 이대 수차석 포(돌을 넣어 대포처럼 소는 무기)에 쓸 돌을 부인들이 앞치마에 담아 날라 큰공을 세워서, 오늘날 부인들의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임진란 3대 대첩은 충무공의 한산도대첩, 진주 김시민 장군의 혈전,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이며, 1603년 건립한 행주대첩비가 있다

 

권율장군

장군은 선조 15년(1582년)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광주목사 등을 역임, 행주 대첩의 승리로 도원수가 되어 전군을 지휘하였고, 선조 32년(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퇴 63세로 별세하니, 선조는 영의정을 추증하고 1등공신 영가 부원군으로 추봉하였다.

 

수원

신라 때는 수성군 고려 태조 때 수원부로 불리다가, 1949년 시로 승격되었고, 1967년에는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이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조선 정조대에는 수원으로 천도할 계획으로 수원성으로 천도할 계획으로 수원성을 쌓았으나, 성곽이 완성된 다음해 49세로 승하하니 수원 천도가 물거품이 되었다.

 

수원성

효심이 지극한 정조 임금이, 부왕의 릉 곁인 수원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고, 임금이 친히 보살피고 영중추부사 채제공을 총 감독으로 하여 1794년 2월에 착공 2년 9개월만에 공사를 끝내 장안문과 팔달문을 비롯 5,525m 길이와 높이 7m의 성곽을 완성하였고, 이 수원성 건설에는 실학의 거두 다산 정약용 등의 과학적인 설계를 바탕으로 채제공, 조심태 등의 감독으로 완성되었음.

완공 당시 5,525m였으나 18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방치되어 왔고 6·25로 파손되어 75년 6월 고 박정희 대통령의 복원지시로 32역8천6백만 원을 들어 복원하였으나 길이가 줄어 지금은 5,099m로 한양성과 송도성은 중국 성을 본 땄으나 수원성은 전래의 축성술과 특수 공법으로 시공 정교한 멋이 특이하다.

 

팔달문 (보물 40호)

수원시 중심가에 위치한 팔달문은 수원성 남대문이며 규모는 서울의 남대문보다 큰 너비가 2.5m 높이가 9m이며, 주각에 올라서면 수원시 전경이 내려다보이며 매년 10월에 개최되는 화흥 문화재는 팔달문을 중심으로 열린다.

 

장안문

수원성의 북문으로 6·25때 문루가 불타고 석문만 남았던 것을 75년 복원 시에 재건하였다.

 

용주사

신라 46대 문성왕 16년 염거조사가 갈양사 옛터에 창건, 조선 22대 정조 14년에 보경 스님이 크게 중창하였다.

남달리 효성이 지극한 정조 임금께서 한양, 지금의 답십리 부근의 부왕의 능을 이곳 화산에 이장하시고 매양 눈물로 얼룩진 참배 길은 그칠 줄 몰랐다. 어느 날 참배 길에서, 보경 스님의 부모은중경의 설법을 들으시고, 일체 중생이 과거 부모형제 안자 없다는 설법에 크게 감동하셔서 많은 시주를 올리고 어진 대왕이 되신 것이다. 정조께서 비명에 가신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크게 지으시고, 낙성식 전날 밤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하여 용주사라 이름지었고 경내에는 국보 120호의 범종이 있으며, 종의 무게는 2천 5백 근이 되고 높이가 144㎝, 구경 87㎝, 두께 7㎝ 된다. 또한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는 판화 및 다수의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으며 사찰 뒤에는 울창한 수목 속에 융건릉이 있다.

 

융건릉

융릉은 정조 임금의 부왕 사도세자의 능이다. 사도세자는 서기 1762sys 5월 21일 창경궁 앞뜰에서, 영조 임금의 명에 따라 쌀뒤주 속에서 굶어 죽으니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후 영조임금은 이를 몹시 후회하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니 생각 사 자 슬플 도 자로서 생각할수록 슬프다는 뜻이다. 건릉은 비명에 가신 부왕, 사도세가에게 효심으로 눈물의 참배 길을 다녔고, 수원성을 축조하였으며 어진 임금이 되신 정조 임금의 능이다.

 

민속촌 (용인군 기흥면 모라리)

문화재 보존 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30만평 대지 위에 22억 원의 공사비를 들였다 25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조선시대 사회적 4개 신분의 사, 농, 공, 상, 의식주 생활을 비롯 사회풍경, 예술에 이르기까지 옛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조선시대의 생활 유물이 가옥마다 전시되고 있으며 99칸의 양반 집과 대장간, 물레방아, 한약방, 시장 등이 있으며 TV 및 영화의 사극물 촬영장이 되기도 합니다.

 

자연농원 (용인군 전대리)

경기도 용인군 전대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성그룹에서 46억 원의 공사비를 투입 450만평의 야산에 자연 동물원, 32만 그루의 희귀 식물원 및 오락시설, 4만평의 양어장 10만평의 과수단지 3만평의 양돈 지를 시설하여 동양 최고의 자연 학습 및 오락시설입니다.

 

와우정사 (경기도 용인군 용인읍 해곡리 107번지)

초파일을 공휴일로 제정하는데 공이 크신 해암 법사께서 남북통일과 구태만안을 기원하고자 인도네시아에서 향나무 한 본을 가져와 6년 걸려 열반 부처님을 조성하고 현 자리에 봉안하니 키가 12미터 둘레가 3미터나 되어 목불 열반 부처님으로는 세계 최대라 한다. 또한 1982년에는 스리랑카에서 워말라 죠티테로 일행이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 두과를 모셔와 봉안하였고, 대웅전에는 인도에서 황동 8만관을 가져와 10년 걸려 조성한 오전불 즉 대세지 보살, 아미타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비로자나 부처님, 관세음보살을 모셨고, 앞으로 천불상과 통일의 종을 조성할 것이라 하며, 부산의 어떤 보살은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 백년화 보살이 열반 부처님의 팔에 매달려 살려 달라고 기도나 한번 해 보라고 하여 그대로 하고 부산으로 돌아갔는데 부처님의 영험이 있었던지 얼마 후 완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와우정사에 들려 부처님의 팔베개에 매달려 기도를 하니 그 부분의 칠이 벗겨지는 손상을 입고 있다고 하며, 진신사리를 임시로 모신 가 법당에 화재가 났을 때는 모든 기물이 불타고 청동으로 만든 종도 녹을 정도였으나 사리를 모신 평범한 유리함은 신기하게도 전혀 타지 않았다는 기적들은 듣는 이를 놀라게 한다.

 

여주 신륵사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하나 확실치 않다.

고려 우왕 2년(1376년 ) 나옹 화상이 주석 하여 입적하였고, 조선 성종 3년 영릉의 원찰이 되어 왕실이 지원을 받아 크게 중창하였다.

【전설】

고려 우왕때 마암에서 (마암이란 여주에서 신륵사 가는 다리를 건너기전 강가의 큰 바위를 말함)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을 마구 물어뜯고 수라장을 만드니, 고려 왕사 나옹 스님이 신륵사에서 이상한 굴레를 가져와 그 포악한 용마에게 씌웠더니, 양순한 말이 되어 나옹 스님이 그 말을 타고 다녔다.

신륵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신기로운 굴레를 가져와, 승마를 항복 받았다 해서 신령할 신 굴레륵 자를 써서 신륵사라 했다 함.

 

조사당

고려말 기울어져 가는 불교계에 한 가닥 빛이 되었던 고승, 지공 스님, 나옹 스님, 무학 스님을 숭배하기 위하여 조사당을 짓고, 중앙에 나옹 스님 좌우에 지공, 무학 스님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보물 180호)

조사당 바로 옆에 무학대사가 그의 스승 나웅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수 백년 생의 향나무가 있다.

다층석탑 : 극락보전 앞에 아담한 대리석 석탑이 있다. 이 백색의 대리석 탑은 흔하지 않으며 원래 9층이었던 것이 지금은 8층만 남아 있다

 

다층전탑

국내 유일 의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 탑이며 고려 시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는 3층 대리석 위에 7층으로 쌓았으며, 층 높이는 9.4m이다. 이 탑은 신륵사를 찾는 사람뿐 아니라 배타고 강물을 오르내리는 사공에게도 눈에 잘 띄는 장소에서 있었고, 벽돌로 쌓아 올린 것처럼 되었으므로 옛날에는 벽절로도 불렸다 한다.(보물 226호)

 

석종

고려 우왕5년(1397년) 나옹 스님의 진골 사리를 봉안한 부도(보물 228호)

 

영릉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세종대왕은 조선 500년 동안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서, 서기 1418년 즉위하여 1450년 승하하실 때까지, 재위 32년간 우리 한글을 만드셨고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등을 만드셨으며 올인 천강지곡,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 등 많은 책을 편찬하셨다.

이 능은 원래 경기도 광주의 대모산에 있었는데 1649년 이곳으로 이장하였고, 1975년 막대한 예산으로 62만 3천평을 성역화 하였으며, 매년 10원9일 한글날 기념 행사와 5월달에는 전주 이씨 숭모제가 열린다.

【전설】

조선 초엽 여주에 세도있고 가문 좋은 김씨네가 살고 있었는데, 이 집에 상을 당해 능서면 왕대리에 묘를 썼다. 그때 풍수가 묘터가 너무 명당이 라 후환이 걱정되니, 절대로 묘 앞에 석물이나 묘 막을 세우지 말라고 일렀다. 그후 김씨네 가문에서는 6조판서가 나오고, 여주에서 위세를 떨치는 집안이 되었는데, 부자가 된 후손들이 조상들이 일러준 유언을 무시하고 비석과 묘 막을 세웠다. 그대 세조대왕 꿈에 세종대왕이 나타났는데, 생소한 모습 그대로이다. 곰곰히 생각한 끝에 대모산 릉 자리가 좋지 않은가 보다 하고 풍수에게 묘 자리를 알아보게 하였다. 풍수가 궁성에 나와 지세를 살피는 데, 서광이 비치어 그 빛을 따라 가니 김씨의 묘 근처였다 그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비를 피해 달려간 곳이 김씨 묘막이었다. 비를 피하고 안개가 걷힌 후 주변의 경치와 지세를 보니 천하 명당인 지라 무릎을 탁 치며 임금님께 아뢰어 김씨네 묘자리에 이장하니 김씨네는 점차 몰락되어 갔다고 합니다.

 

영릉 (사적 제195호)

세종대왕릉의 동편에 조선 제 17대 왕인 효종대왕과 비 인선왕후의 능인 영릉이 있다. 효종대왕은 1619년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봉림대군에 책봉되었다가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왕세자로 책봉되고 1649년에 즉위하였다. 휘는 호, 자는 정연이며,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끌러가 8년간이나 볼모로 지냈다. 효종대왕은 북벌의 원대한 뜻을 품고 송시열, 이완 등 인재를 등용하여 국가의 내실을 기하면서 국방력의 강화에 주력하였다.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여 세제를 일원화하고 주조 사업을 통해 주화의 유종을 꾀했으며 어영청을 두어 군비를 확충하고 군사를 조련하는 등 양병에 힘썼으나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위 10년만이 s 1659년 승하하여 북벌의 꿈이 무산되었다. 대왕이 능은 원래 도구릉 원릉 자리에 조영하였으나 30년 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경내에 2기의능침을 비롯하여 정자각. 비각, 수복방, 홍살문, 재실 등의 시설물이 있으며 1978년에 이곳도 크게 정화되었다.

 

남한산성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은 밤보다 낮이 길다하여 일장산 또는 주장산이라 불리고 해발 496m로서 천연적인 요새지다. 산정은 조선시대 광해군 13년(1621년)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을 시작하였고, 청재종의 침략이 구체화되자 인조 2년 증축을 시작 2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병자호란 때 이곳에서 크게 패해 인조 임금은 두 왕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는 큰 수모를 겪었다.

【전설】

병자호란때 인조 임금이 난을 피해 남한 산성으로 가던 중, 피로가 심해 잘 걷지를 못하였다. 이때 근처에서 나무를 하던 나무꾼 서근남이라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인조를 등에 업어 남한 산성으로 모셨다. 인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줄 테니 말하라고 하니, 무식한 나무꾼은 임금님이 입은 곤룡포가 구하게 보였던지 그것을 원한다 하여 임금은 그가 원하는 곤룡포를 하사했다. 그 뒤 서시가 죽자 유언에 따라 곤룡포와 같이 병풍산에 묻으니, 이 무덤 앞을 지나는 대소 관원들은 곤룡포가 묻힌 곳이라 해서 말에서 내려 걸어 지나갔다고 한다

 

천진암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

천주교에서 최고로 오래된 성지로 손꼽히는 이곳은, 1780년 최초로 천주교회가 세워져 있으며 정약용, 이승훈 등이 천진암에서 학문을 논하였고 이 벽이 천주와 영혼 불멸설을 가르치고, 달력이 없어 7일, 14일, 21일, 28일을 천주 공경의 날로 정하였다.

 

인천

경기도 최고의 도시이며 우리 나라 제2의 국제 무역항이다.

신라때는 소성이라 불렸고 조선 재종 13년(1413년)에 처음 인천이라 불렀으며, 제물포라는 작은 어촌이 강화도 조약 한·일 제물포 조약등이 체결됨으로서, 국제항으로 발전되어 1981년 7월 1일 부로 직할시로 승격했으며, 인천항은 간만의 차가 평균 7·5m나 되어 설물대 나타나는 갯벌은 망망한 평야를 연상하게 하고 영흥도 덕적도 등의 섬들이 천연 방파제가 되어 좋은 항구가 되었다.

 

자유공원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1888년 11월 9일 우리 나라 최초로 서구식공원을 만들고, 이름을 만국공원이라 하였다가 1957년 10월 3일 인천 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원수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자유공원으로 개명하였으며 인천 앞 바다와 시가지가 한눈에 보여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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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