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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북도

 

관촉사 (논산군 은진면 관촉리)

관촉사 하면 몰라도 은진미륵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 사찰은 서기 968년 고려 광종때 혜명대사가 창건하였는데, 한 여인이 반야산에 올라 고사리를 꺾다가 산중에 느닷없이 애기 울음소리가 나 이상하게 여기고 여인이 울음소리를 따라 찾아가 보았지만, 애기는 보이지 않고 갑자기 땅이 진동하면서 눈앞에 거대한 바위가 솟아오르는지라, 놀란 여인이 급히 고을 원님에게 고하였다. 이 사실이 광종 임금까지도 알게 되어 신하들과 의논하여 필시 이 바위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므로 혜명대사에게 명하여 부처님을 새기도록 하니 대사는 백 여명의 석수를 이끌고 내려와 대역사를 시작하여 맨 먼저 올라온 바위로 부처님 아랫도리를 조각하고 그 다음 몸체 또 다음바위로 위 부분을 조각하였는데, 기중기나 크레인이 없던 시절이라 올려 맞출 일도 큰 문제였다. 아무리 연구해 보아도 뾰족한 수가 없어 머리도 식힐 겸 사제촌 냇가에서 쉬고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미륵 쌓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랫도리를 흙으로 메워 평지를 만든 다음, 동체를 굴려 올리고 도 흙으로 메워 평지를 만들어 상체를 굴려 올린 다음, 흙을 모두 치우니 미륵불이 우뚝 서 있었다. 옳거니 바로 이것이다. 무릎을 친 혜명대사는 즉시 작업장으로 달려와 공사를 지시라고 냇가로 와보니 조금 전가지 있던 아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스님의 정성에 문수보살이 방법을 알려 주려고 신한 것이었다. 무려 37년간이나 걸려, 고려 7대 목종 임금때 완성을 하니 불상의 미간, 백호 수정에서 21일간 광명이 발하여 그 빛이 멀리 중국 송나라에도 비추니, 그곳 지안대사가 빛을 따라 이곳에 와서 석불에 배례한 뒤 돌아가 중국 가주에도 이와 같은 대불상을 세우니 광명이 동서에서 빛났다하여 관촉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경내에는 보물 232호 석등과 보물 218호인 은진 미륵불이 보존되어 있는데 미륵불의 높이가 18.2m 둘레가 11m, 귀 길이가 3.3m나 된다 하며, 은진미륵이 완성된 후 오랑캐가 압록강으로 파죽지세로 쳐들어오는데 어디선가 가사를 입고 삿갓을 쓴 스님이 나타나 태연히 압록강을 건너가는데 강물이 스님의 가슴까지밖에 안찼다. 오랑캐들은 스님이 건너온 곳이 물이 얕은 곳으로 알고 강물에 뛰어드니 모두 물이 깊어 빠져 죽었다. 화가난 오랑캐 장수가 건너온 스님을 칼로 내리쳤으나 스님의 삿갓을 스치고 말았다. 이 스님이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현신한 은진미륵이 라하며,, 그래서인지 지금도 미륵불의 갓을 보면 한쪽 귀퉁이가 덜어져 꿰어 맨 것을 볼 수 있다.

 

부여

백제 소부리군이였는데, 서기 538년 백제 성왕이 공주에서 이곳으로 도읍지를 옮겨 서기 660년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 때까지 123년간 백제의 왕도로서 사비라 하였다. 서기 660년 7월 당나라 서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 나·당연합군이 백제 계백 장군이 거느린 겨우 5,000의 군사와 수차래 싸웠으나 용감한 계백 장군을 이길 수 없었다. 화랑 관창의 희생으로 사기를 얻은 신라군의 공격으로, 7월 11일 계백 장군이 전사하고 12일 사비성이 함락되니 꽃다운 삼천 궁녀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백마강 푸른 물에 빠져 죽었으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향락만 누리던 의자왕은 왕자와 신하 93명, 그리고 1만 2천명의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낙화암과 백화정

고려말 이름난 학자 이가정은 하루에 금성이 기왓장 무너지듯 천적 푸른 바위이름은 낙화라 하며, 이 바위의 애틋한 사연을  백제의 마지막 말과 함께 노래했었고, 백제가 번영을 누리던 시절에는 임금의 잔치 터로 대왕포라 불려졌으며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는 날 삼천 궁녀들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해, 꽃잎이 지듯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떨어져 죽었다. 서기 1929년 당시 부여군수 홍한표가 낙화암에서 꽃처럼 지고 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의 영혼을 기리고자 정자를 세우고 백화정이라 불렀습니다.

 

고란사

창건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시대 궁중의 내불당으로 지어졌다고 하며 또는 고려시대,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 궁녀를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수차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며 법당 뒤편에는 고란 약수가 있다. 백제 임금들이 식수로 사용할 때 고란초 잎을 한 잎씩 띄워 마셨다 하며 신라 원효대사가 백마강 하류에서 강물을 마셔보고 그 상류에 진란과 고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조선 세종 임금때 편찬된 향방약성대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한방에서 화류 병에 특효 하다는 고란초는 희귀식물로서 번식이 어렵고 수명은 30년에서 50년으로 거의 멸종되고 고란사 법당 뒤 절벽에 30여 포기 자랄 뿐이라고 한다.

 

백마강의 유래

서기 660년 의자왕 20년에 당나라 소정방이 수군을 이끌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 사비성이 아득히 바라다 보일 때, 깊은 안개가 강물 위를 뒤덮어 한치 앞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백제의 선왕이 죽어서 용이 되어 깊은 물 속에 있다가 백제를 침공하는 적을 막기 위해 깊은 안개를 퍼트린 것이었다. 소정방은 선왕이 생존시 백마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강물에서 용을 낚아 올렸다고 강 이름을 백마강이라 하였으며 그대 소정방이 용을 낚기 위해 낮아 있던 바위가 움푹 패인 자국이 남아 있어 조룡대라 부른다. 일명 백제탑은 국보 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아울러 백제 최고의 탑이며, 소정방이 백제를 치고 이 탑에 평제 기공 문을 각자 해 놓았고 높이가 8.33m이다. 단아한 이 석탑은 백제인 들의 품격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우리 나라 석탑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보물 108호인 석불은 백제 탑과 마주 보고 있으며 심한 마멸로 형체를 알아 볼 수 업도록 파괴되었으며, 손발이 없고 머리에 관보를 쓴 특이한 석불이며 높이가 5.6m이다.

 

계백 장군 동상

백제 700년 사직이 무너져 갈대 먼저 부인과 아이의 목을 베고 출전하여 나·당연합군 18만 대군과 겨우 5,000의 병사로 황산 벌에서 4차례 분전 적을 쳐 부셨으나, 중과 부족으로 모두 옥쇄. 서기 660년 7월 11일 전사하였다. 군청앞 로터리에 말 타고 달리는 동상은 김종필씨가 사재로 세웠다 한다.

 

불교 전래 사은비

백제 대교를 건너기 전 왼쪽에 위치한 사은비는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은혜에 감사하며 옛 백제 땅에 불교 전래 사은비를 세웠다.

건립 발원 자는 다나까씨이며 건립은 일본 불교 전래 사은 사업회에서 1972년 5월 10일 높이 5m로 건립하였습니다.

 

자온대

백제 대교 길이 812.7m 폭 12.5m 높이 10m를 건너면 왼쪽 강변에 큰바위가 있다. 백제의 왕이 왕흥사 행차때 이 바위를 거쳐가는데 왕이 이 바위에 앉으면 스스로 따뜻해져 자온대라 하였고, 의자왕이 낚시하던 바위라고도 하는데 의장왕이 바위에 앉으면 따뜻해 졌다고 합니다. 자온대 위에는 조선 광해군 대 양주 목사 김흥국이 인조 반정을 피하여 이곳에 와 정자를 짓고 그의 호를 따라 수북정이라 부르며 살았다는 루가 있다.

 

만수산 무량사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해발 575m의 만수산 기슭에 자리한 무량사는 신라 30대 문무왕 때 범이 f국사가 창건하였다 하나 현존하는 탑, 석등 등이 모두 고려대 것이라 신빙성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술 잘 마시는 진묵대사가 무량수불을 점안하고 나무 열매로 술을 빚어서 마시고 시를 지었으며, 고대 소설의 효시인 금오신화를 지은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 59세대 열반하니 그의 유언대로 3년간을 묻지 않고 관속에 두었는데, 3년후 관을 열어 보니 살아있는 듯 변하지 않았다고 하며 화장을 하니 사리가 나와 부도를 만들었으며 보물 356호인 극락전은 화엄사 각황전, 법주사 대웅전과 함께 기도 영험이 있기로 유명하고, 경내에는 보물 185호인 5층 석탑과 보물233호인 석등이 보전되어 있다.

 

공주

삼국시대 고구려의 세력이 남으로 확장되자 백제는 위례성 지금의 경기도 양주 땅에서 도읍을 지금의 공주(웅진성)로 옮겼다.

서기 538년 백제 성왕 16년 지금의 부여 (사비성)로 천도할 때까지 63년간 백제의 왕도였다. 서기 940년 고려 태조때 공주라 불렀고 1923년 충남 도청을 대전으로 옮기기 전 도청 소재지였으며 읍으로는 유일하게 두 개의 대학을 가진 교육도시이자, 1971년 무령왕릉이 1200년의 신비를 깨고 발견됨으로 계룡산과 더불어 관광지로도 부각되었습니다.

 

무령왕릉

백제 25대 무령왕릉과 왕비의 합장한 무덤을 1971년 7월 8일 발굴하니 금관을 비롯하여 백제 유물 약 2,500점과 연대가 확실한 지석이 발견되었다. 무령왕은 백제 25대 임금으로서 23년간 재위하였으며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석의 내용을 보면 서기 523년 5월 7일 돌아가시어 2년 후인 525년 8월 12일 이곳에 묘를 쓰고 장사지냈다 라고 쓰였으며 유물 유적은 12점이 국보로 지정되어 공주 박물관에 보관되었습니다.

 

공주박물관

1940년 공주 사적 현창회가 옛 충청도 관찰사 정사청으로 사용되었던 선화당에 개관하였고 1971년 무령왕릉의 출토품이 수습되면서 1973년 10월 확장 신축되어 오늘에 이르며 무령왕릉 출토 유물유적 등을 소장하고 있다.

 

공산성

백제가 위례성에서 공주로 천도하여 쌓은 웅진성으로, 해발 110m의 야산에 동서 800m 남북 400m를 쌓은 성곽으로 일명 쌍수 성으로도 불린다. 서기 1623년 조선 인조 임금이 이괄의 난으로 한양이 반군에게 점령당하자 이곳 공산 성으로 피난 와서 강죽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산등성이에 올라 두 그루의 고복에 기대여 한양 쪽을 바라보며 환궁할 날만 기다리는데 이괄의 난을 평정하였다는 소식을 이곳에서 듣게 되어 크게 기뻐한 나머지 두 그루의 고목에 동 3품 통정 대부 벼슬을 내리고 쌍수정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는데 뒤에 신하들이 정자를 짓고 비석을 세워 쌍수성 이라고도 하였다. 인조 임금이 이곳에 피난 와 있을 때 어느 날 임시라는 농부가 찰떡을 해 가지고 임금님께 바쳤는데 그 떡맛이 좋고 처음 먹어 보는 덕이므로 신하들에게 떡 이름을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어 떡 이름을 지어 내렸는데 임서방이 절미한 떡이라 하여 임절미라 한 것이 오늘날 인절미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곰나루 전설

곰나루는 웅진 나루로서 옛날 다리가 없을 대 공주의 중요한 나루터였다. 옛날 주미산 아래 곰의 화신인 웅녀가 굴속에 살았는데 외로워서 조강지처를 가진 나무꾼을 납치 굴속에 가두고 같이 살면서 먹을 것을 구하러 갈 때는 커다란 바위로 막고 다녔다. 삼년을 같이 살다보니 자녀 셋을 얻었지만 항상 그리운 것은 마을에 두고 온 처자였다. 웅녀는 아이까지 셋을 낳았으니 이제는 굴 문을 막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굴 문을 열어 둔 채고 나갔다가 돌아오니 이미 도망쳐 금강을 헤엄쳐 건너가고 있었다. 웅녀는 아이들을 안고 돌아오라고 울부짖었지만 돌아오지 않으니 아이들과 같이 웅진나루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로부터 강물이 사나워져 풍파가 심하고 마을에는 흉년이 들고 물이 잔잔해져 사람들은 웅진 나루를 곰나루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계룡산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조선 5대 명산인 계룡산은 산 모양이 마치 닭 벼슬을 쓴 용과 같다하여 계룡산이라 붙여진 이 산은, 해발 828m로서 석영 암반이 산이라 상봉에도 물이 풍부하고 1964년 한국 8대 관광지 투표에서 5위를 하였으며 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동학사와 갑사 남매탑 등의 관광지가 있으며 조선 태조가 도읍을 정하려고 공사를 하다가 주춧돌 등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동학사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

서기 724년 신라 33대 성덕왕때 상원조사가 암자를 지어 수도하였으며 그의 제자 회의 화상이 중창하여 상원사라 하였고 921년 고려 태조 왕건 때 도선 국사가 중차하여 태조 원당이 되었으며 서기 937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유차달이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재상을 제사지내면서 동계사를 건축하여 절 이름을 동학사라 하였다. 그후 야은 길재선생이 고려 왕족과 포은 정몽주 선생을 위해 제사 지낸 것이 효시가 되어 1399년 조선 2대 정종때 작고한 몰은 이색, 야은 길재 선생을 초흔 제사하고 고려 3은의 위패를 모셔 매년 제사를 지내는 삼은각과 억울하게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과 단종비 또한 황보인, 김종서, 정분, 삼재상과 사육신 등의 위패를 모신 숙모전 등이 있으며 현재는 여승들의 강원이 되어 3년간의 수도승 생활을 마친 비구니들이 동학사에 와서 6년 과정의 교육을 받는다고 합니다.

 

남매탑의 전설

신라 33대 성덕왕때 상원조사가 동학사의 시초가 된 암자를 짓고 수도를 할 때 어느 날 밤 큰 호랑이가 목에 가시가 걸려 울부짖는 것을 뽑아 주었더니 며칠 후 커다란 멧돼지를 물고 왔는데 배가 고팠으나 수도승이라 먹지 않았다. 또 며칠이 지난 후 호랑이는 예쁜 처녀를 업어다 놓고 사라졌습니다. 상원조사는 기절한 처녀를 간호하여 소생시켜 물어 본 즉 처녀는 경상도 상주땅 김화공의 딸이었다. 처녀는 생명의 은인인 상원조사에게 부부될 것을 간청하였지만 끝내 거절하며 아내 아닌 의남매로서 지내자하여 함께 수도하며 살다가 성도 하였다고 하는데, 죽은 뒤 두 남매의 몸에서 사리가 나와 스님의 제자인 회의 화상이 이곳에 탑을 세웠다 하고 오라비 탑은 7층탑이며 누이 잡은 5층이라 한다.

 

갑사 (공주군 계룡면 중장리)

계룡산 연천봉 서쪽 계곡에 위치한 갑사는 420년 백제 구이 신왕때 아도 화상이 창건, 신라 문무왕때 의상 대사가 중건하였고 임진 왜란때 왜적들에게 전부 소실되어 1604년 선조 임금때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건되고 1899년 고종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며 경내에는 보물 256호인 당간지주 보물 257호인 갑사부도 보물 478호인 동종 보물 582호인 월인석보 목판이 보존되어 있으며, 임지란 때 소실된 절을 중수할 때 인호 스님 등 여러 스님이 노력하였으나 진척이 없어 고심하던, 인호 스님의 꿈에 소 한 마리가 내가 지어줄 테니 걱정 마시오 하면서 걸어오는 것이었다. 잠에서 깬 스님이 이상하여 밖을 나가보니 꿈에 본 소가 있었다. 그 후 필요한 자재들을 이 소가 운반하여 갑사 중건을 매듭지었는데 고생하며 힘을 다 쓴 소는 병들어 죽어버려 소의 공을 고맙게 여긴 스님들이 탑을 세웠다는 공우탑이 있습니다.

 

마곡사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기슭에 자리한 마곡사는 춘 마곡 추 갑사라는 말 같이 우거진 녹음과 갖가지 새 소리가 어울려 봄 경치가 좋다는 이 절은 서기 640년 백제무왕때 자장 율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문수보살로부터 석가 사리와 가사를 받들고 귀국하여 통도사, 월정사와 함께 마고사도 창건하면서 산명을 당나라 유학할 때 산명인 태화산이라 하였으며 사명을 스승인 마곡, 보철 화상을 사모함에 지은 이름이라 하며, 또는 율사가 설법할 때 법문을 들으러 몰려 온 사람들이 마치 삼대 같이 무성했다하여 마곡사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구한말에 백범 김구 선생이 민비 시해 사건에 중요 인물인 일본 헌병을 죽여 인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약 130년 전 어떤 앉은뱅이가 불구를 고치기 위해 절에 찾아와 법당에서 100일 기도를 하는데 참나무 돗자리를 100일 동안에 걸쳐 짜면서 부처님께 불구를 고쳐달라고 기도하였더니 돗자리를 다 짜고 밖으로 나갈 적에는 자기도 모르게 일어서서 걸어 나갔으며, 지금도 법당에는 앉은뱅이가 짠 자리가 법당에 있고 경내에는 세계에서 한국, 인도, 중국 세나라 밖에 없는 원나라 영향을 받은 라마식 5층 석탑이 있으며 보물 269호와 270호로 지정된 감지 은니묘법 연화경이 있었으나, 보존이 어려워 국립 중앙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대전 제2국립묘지

1975년 착공하여 85년 11월 13일 준공되었으며 백만 평 부지에 14만 영현을 안치할 수 있는데 지금은 약 2만여 영현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유성온천

발견된 연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초 이전에 이미 온천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동학사, 갑사 등지의 절을 드나드는 스님들이 이곳에 들려 몸을 깨끗이 씻어 정하게 하여 입산하였다 하며 조선 태조 임금은 새 왕도 건설 후보지 인 계룡산에 들렀다가 이곳에 들려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수온 약 45℃로서 칼슘, 유황, 라듐이 함유되어 신경통에 효염이 있다고 합니다.

 

대전

구내 교통의 중심지이자 충청남도 도청소재지인 대전은 예산에는 한밭으로 불렸으며, 1905년 경부선이 개통과 1907년 호남선의 개통으로 많은 발전을 보았고 1949년 시로 승격되었다. 대청댐의 준공과 인근의 유성 온천, 계룡산 등의 관광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입니다.

 

대덕연구단지

1973년 840만평의 부지에 앞선 과학 기술을 우리 스스로 개발하기 위해 약 30여개의 연구기관을 설치하여 유전공학, 첨단과학기술,, 표준연구 등을 하는 우리 나라 최초의 과학 연구단지이다.

 

금산 7백 의총

임진왜란 때 조헌과 영규대사가 지휘하던, 7백 명의 의병이 금산을 수복하려고, 이곳에서 왜군과 1592년 8월 18일 혈전을 벌여 용감히 싸웠으나 신식 무기와 중과부족으로 모두 전사하여, 싸움이 끝난 후 조헌의 제자들이 7백 의사의 시체를 한 무덤에 합장하고, 7백 의사총이라 하였으며 경내에는 기념관이 있으며, 인근에 금산 위성통신 지구국이 1970년 개국되어 인공위성과 교신하여 외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운동 시합을 즉시 중계할 수 있어 안방에 앉아서 현지와 같은 시간 에 시청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 금산에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 자랑하는 영약, 인삼이 많이 재배되어 외화획득을 만이 하는 곳입니다.

 

대청댐

1975년에 착공 1980년 12월 2일 준공되었으며 총 공사비 1,464억원이 들어 길이 495m 높이 72m 저수량이 14억9천만 톤이고, 수력 발전으로 하루 9만㎾의 전기를 생산, 연간 31만 드럼의 기름을 절약하게 되었고 댐의 완공으로 충청남·북도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으며 대전, 청주, 공주, 부여 등지에 생활 용수 및 공업 용수공급과 용수조절 그리고 금강 하류의 염수 피해방지 등의 많은 역할을 하게된 다목적 댐입니다.

 

천안

능수버들과 삼거리, 도한 호도 과자가 유명한 천안은 고려 태조 서기 930년에 천안으로 불렸으며 1963년에 시로 승격, 오늘에 이른다. 천안의 명물인 호도 나무는 서기 1286년 유청신이라는 사람이 원나라에서 묘목 3그루를 가져와 고향인 광덕사에 심은 것이 전국으로 퍼졌으며 영양분이 많아 약용과 술안주 또한 호도 과자 등 많은 곳에 쓰인다.

 

【능수버들과 흥타령 전설】

조선 초엽 경상도 함안 땅에 유봉서라는 무관이 홀아비로 능소라는 어린 딸과 살았는데 때마침 수자리(변방을 지키는 군인)로 가라는 어명을 받아 능소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다 천안 삼거리 주막집에 이르러 날이 저무니 하룻밤 유숙하게 되었는데, 어린 딸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갈 수도 없고 하여 주막집 주모에게 능소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이별을 할 때 증표로 짚고 왔던 버드나무 지팡이를 주막집 앞에 꽂으며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하였다. 세월은 흘러 능소의 나이 이팔 청춘 16세가 되었으나 아버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고, 능소는 어찌할 수 없이 기생이 되었으나 처신을 깨끗이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전라도 고부 땅에 사는 박현수라는 선비가 과거보러 한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러 주막집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능소에 반해 사랑을 고백하고 하룻밤 인연을 맺고, 과거 급제하여 능소를 찾아오마 하며 떠나갔다. 세월이 흘러 봄이 되니 버드나무 가지에 잎이 피고 축 늘어졌는데, 하늘도 무심치 않아 박현수 선비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삼남 어사로 제수 받고 삼거리 주막집에 달려와 반가움에 얼싸안고 춤을 추며 천안 삼거리 흥, 능수야 버들은 흥, 제 멋에 겨워서 축 늘어 졌구나 흥, 하며 노래를 불러 이것이 천안 삼거리 흥타령의 시초가 되었고, 아버지가 증표로 심었던 버드나무를 능수버들이라 부르게 되어 유명해졌으며 능수버들의 유래가 되었다.

 

독립기념관

충남 청원군 목천면 흘성산에 세워지는 독립기념관은 전국민의 성금 약 5백억 원을 들여 1983년 8월 15일 착공하여 1986년 8월 15일 준공된다. 총부지 121만평에 건평 약 18,000평, 기념관의 높이 45m, 길이 126m, 폭 67m이며 지름 2m40㎝의 돌기둥 40개가 떠받치고 있는 지붕은 국내 최초로 개발한 동기와 41,316장으로 덮어 황금빛이 장관을 이루며 지붕 면적이 3,000평으로 축구장 넓이만 하다. 처마 끝에는 겨울에 고드름 방지용인 난로가 설치되었으며, 기념관 내에는 1983년이래 국내·외에서 모아진 7,3832종 31,523점의 각종 자료와 국난 극복의 상징인 거북선이 전시된다. 옥외에는 높이 51,3m의 화강석 5천5백개로 만든 독립기념관 상징 탑이 있으며, 3·1정신을 기리는 높이 6m 지름 8m의 3·1정신상이 세워져 있다. 전시자료는 수집 량에 다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각원사 청동불 (천안시 삼룡동)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시키기 위해 지략을 기르고 폈다는 태조산, 우청룡 좌백호 명당자리에 남북 통일을 기원하는 도장으로 건립하고 있으며 좌불상은 세계 최대의 청동 좌불로서 무게가 60만톤 높이가 14.5m 둘레 30m의 거대한 불상이며 주차장에서 103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망향동산

망향 휴게소 건너편에 위치한 동산은 죽어서, 뼈라도 조국에 묻히고 싶다는 해외 동포들의 염원에 따라 이국 땅에서 외로이 숨져간 동포들의 영혼을 생전에 그리던 조국 하늘 아래 편히 잠들 수 있도록 공원 묘지로 가꾸어 매년 10월 2일 망향의 날로 정하고 합동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1976년 6월 20일 착공 76년 10월 20일 준공 총 부지 10만5천 평 묘지평수 3만평.

 

온양온천

발견된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시대 이전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한글을 만드시느라고 눈병을 얻은 세종대왕께서도 이곳에 행차하여 신병을 치료하였으며, 피부병으로 고생한 세조 임금도 이곳에 자주 행차 온천수로 목욕을 즐겼다하며, 어느 날은 오른쪽에는 따뜻한 온천물이 솟고 왼쪽에는 차가운 냉천이 솟아 나라에 길조라 한 뒤 그곳에 비를 세우고 신정이라 하였다. 도한 옛날에 다리를 저는 불구 총각이 다리를 낫게 해 달라고, 관세움보살님께 지성으로 기도하였더니 꿈에 현몽하기를 내일 들판으로 나가면 학이 앉는 곳이 있을 것이니 학과 같이 하여라 하였다. 날이 밝아 들에 나가보니 다리를 다친 학이 어느 한 곳에 앉았다 날고 앉았다 날고 하였다. 총각은 그곳으로 가보니 조그만 옹달샘에 김이 모락모락 나고 물이 따뜻하여 그물로 다리를 씻고 담그고 하여 병이 나았다고 한다. 약 60년 전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어, 현대식으로 욕탕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장항선이 개통으로 널리 알려졌고 수온은 약 45℃∼55℃로서 탄산칼슘, 황산 마그네슘 등의 성분이 함유되어 피부병, 부인병,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온양민속박물관

도서출판 업체인 계몽사 김원대 회장이 수집해 온 많은 민속자료 및 민속품들을 대지 2만2천5백평의 전시실에 전시하여, 옛사람들의 의식주와 생활사을 보며 연구할 수 있도록 1978년 개관하여 조상들의 얼을 되새기도록 하였다.

 

현충사

나라를 구하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기 1704년 조선 19대 숙종때, 장군이 어릴 때 자랐던 이곳을 사당을 세웠는데, 일제시대에 퇴락 하여 쓰러져 가던 것을 1932년 동아일보사에서 크게 보도,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성금을 내 1936년 보수하였고, 5·16혁명이후 고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배려로 성역화 되어, 현재의 규모로 단장되어, 1969년 충무공 424탄신일 을 맞이하여 준공되었다. 경내에는 장군이 사시던 고택과 활터 충무정 등이 있으며, 유물관에는 7년동안 임진왜란의 일어난 일을 적은 충무공 친필인 국보 76호의 난중 일기를 비롯 많은 유물들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아산만 방조제

경기도 평택군과 충남 아산군과의 경계를 이루는 안성천을 가로막은 방조제는 총 공사비 33억5천5백만 원을 들여 길이 2,564m 높이 17m로 1971년 3월 착공하여 1974년 준공하였으며, 이 일대의 농업용수와 공업용수 확보와 농산물의 염분피해를 막았으며 홍수조절 등으로 많은 양의 쌀을 증산하게 되었다.

 

삽교 방조제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와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 바다와 삽교천을 가로막은 방조제로서 국내에서, 대호 방조제 영산강 하구언 다음으로 세 번째로 긴 3,360m로서 공사비 186억 원을 들여 1977년 착공하여 1979년 10월26일 준공되었습니다. 이 방조제의 준공으로 8천 4백만 톤의 물을 확보하여 4개군 22개 읍, 면의 농토가 수해, 한해, 염해를 막아 많은 쌀이 증산되며, 당진과 서울간의 거리를 100리 단축하게 되었고, 물개 3마리 상은 예로부터 물을 잘 다스리는 나라는 크게 부흥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도 물을 잘 다스리자는 뜻에서 물에 사는 물개 세 마리 상을 세웠는데 자세히 보면 한문으로 물 수자요, 머리부분을 보면 영어의 물의 뜻인 water의 첫머리 글자인 w자의 형상이다. 또한 이곳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으로 준공식에 참석하시고, 그날 저녁 궁정동 만찬 석사에서 서거 하셨기 때문에 한이 많은 방조제가 되겠습니다.

 

대호 방조제

우리 나라 최대의 방조제로서 서산군과 당진군에 걸쳐 2개군 10개 읍, 면의 안정된 농업 권을 개발하고, 인근 도시의 생활 용수를 공급하여 복지농촌을 조성하니 대 역사이다. 1981년 착공하여 1984년 11월에 준공을 보였으며 총공사비 1,270억원이 투입되어 길이 7,807m의 거센 물살을 막기 위해 울산 현대 중공업이 고철 값으로 사들인 배로 물막이 에 성공 우리의 순수한 기술진에 의하여 난공사를 완공시켜 연간 3만8천톤의 식량을 증산하게 되었습니다.

 

도고온천 (아산군 도고면 기곡리)

아산군 도고면 기곡리에 위치.
신라 때부터 유래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인근 지방민들 사이에 약수터로 알려져 있는데, 도고 호텔이 들어서면서 알려지기 시작, 약알칼리 천, 염천으로 피부병과 마시면 위장병에 좋은 약수가 된다.

 

윤봉길 의사 충의사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이곳에 태어나 농민운동에 힘T다 독립 운도의 뜻을 품고 상해로 건너가, 김구선생의 한인 애국단의 단원이 되어 1932년 4월29일 일본이 상해 사변에서 승리한 전승 기념식을 상해 홍구 공원에서 열릴 때, 도시락에 폭탄을 숨겨 들어가서 기념식장에 던져 당시 거류민 단장 및 일본군 최고 사령관이 죽고 많은 인사들을 중상을 입히고 체포되어 25세를 일기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면서 총살되었다. 충의사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정을 모시고 매년 의거일인 4월29일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며, 경내 유물관에는 윤봉길 의사의 유물들을 보물568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으며 사당건너편에 의사의 생가가 있다.

 

수덕사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 남쪽에 위치한 수덕사는 서기 599년 백제 법왕때 지명법사가 창건하여 원효대사가 중건, 고려 때는 나옹 화상이 근세에는 송만공 선사가 주설 하며 크게 선풍을 떨쳤고, 한때 화제를 모았던 '청춘을 불사르고'의 여류시인  김일엽 스님이 이 절에 기거하여 널리 알려졌으며, 송춘희가 불러 크게 히트한 수덕사의 여승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경내에는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아울러 고려시대의 대표적 목조건물인 구보49호 대웅전이 있으며 여승들의 교육도장이다.

 

고시레의 유래

시골 농부가 논둑에서 식사를 할 때나 도회지 사람들이 소풍이나 야유회를 가서 음식을 먹기 전  밥이나 술을 던지며 고시레하고 외치는 관습은 옛날 충청도 당진 땅에 고씨라는 늙은 홀아비가 살았는데 얼마 안돼는 논인데다가 비가 조금만 와도 수해를 입고 며칠만 비가 안와도 한해를 입는 박토여서 굶기를 부잣집 밥먹듯 하였다. 그래서 고씨는 곡식을 심어 놓고 어서 자라기를 기원하였지만 가뭄이 계속된 어느 해 애써 가꾼 곡식이 메말라 가는 것을 보다 못해 바가지고 아래 논에서 물을 펴 올리기 시작하였으나 늙고 먹지 못한 고씨 노인은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죽은 며칠 후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고씨네 논이 바라다 보이는 건너편 산허리에 묻혔고, 그후 한 마을에 살던 전서방이 논둑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첫 숟가락을 뜨는 순간 산허리에 고시네 무덤이 보이는 지라 전서방은 일평생 일만 하고 고생하다 먹지 못하고 죽은충주시

남으로는 달천강, 북으로는 남한강이 흘러 합쳐 돌아가는 기름진 땅이며 서기 982년 충주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1805년 도청 소재지였으나 1908년 청주로 옮겨갔으며, 서기 1956년 7월 충주시로 승격되었고 특산물은 사과, 담배 등이며 우리 나라 최초의 비료공장은 1930년 함경북도 흥남시에 세워진 흥남비료공장이지만 남한 최초의 비료공장은 1958년 세워진 충주비료공장으로서 국가 농업발전에 큰 몫을 하였지만 이제는 낡은 시설과 최신 설비를 갖춘 타지역의 비료공장들에게 할 일을 넘겨주고 사양길에 접어들었으며 관광지로는 충주댐, 탐금대, 월악산, 수안보온천 등이 있다.

 

탄금대

남한강과 달천강이 합류되는 벼랑 위에 고구려 왕산악, 조선의 박연과 아울러 우리 나라 3대 악성인 신라의 우륵이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즐겨 탄 곳이라 탄금대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신립 장군이 이곳 달천강에서 배수진을 치고 새제를 넘어 북상하는 왜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족으로 모두 전사한 곳이며, 신립 장군이 왜적을 맞아 싸울 때 얼마나 활을 빨리 쏘았던지 활 시위가 뜨거워져 바위벼랑을 열 두 번이나 오르내리며 강물에 활을 식혔다고 이름 지어진 열두대 등이 있으며 충주 시민들이 좋은 휴식처이다.

 

충주댐

충북 청주시 종미동과 중원군 동양면 조동리 계곡을 연결하며 총 공사비 5천4백74억2천8백만 원을 들여, 1978년 6월 착공하여 1985년 10월 17일 7년 4개월만에 준공, 국내 최대의 콘크리트 댐으로서 높이가 97.5m, 길이 447m, 저수지 길이 85㎞, 저수량 27억 5천만 톤, 수심 145m, 시멘트가 12톤 트럭으로 24,600대 분이 들었으며 하루 41만㎾의 수력 발전으로 년간 1백6만 드럼의 기름을 절약 5천만 달러의 외화를 절약하게 되었으며, 충주, 중원 및 수도권의 생활 용수와 공업 용수, 홍수 조절 및 한해를 극복하여 년간 3만7천 톤의 식량을 증산하게 되었고, 이 공사로 인해 7,105가구의 수몰 민이 생겼으며 단양 읍이 물에 잠겨 신 단양으로 약 12,000명이 이주하였다.

 

충렬사

조선 16대 인조 임금 때의 명장 임경업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서 서기 1726년 영조임금때 이 지방 유생들이 조정에 건의, 왕명으로 건립되었으며 1727년 충렬사라 사액을 받았다. 임경업 장군은 1618년 광해군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1624년 인조 임금때 이괄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이로 인해 진무원 종공신 훈 1등을 받은 공신이 되었고 병자호란 때에도 많은 공을 세웠으나 1644년 심기원의 모반으로 삭탈관직 54세로 돌아가셨다. 그 후 누명을 벗어 1706년 숙종때 충민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1978년 성역화 되었고 경내에는 기념관이 있어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수안보온천 (중원군 상모면 온천리)

충북 중원군 상모면에 위치한 이 온천은 약 600년전 문둥병을 앓고 있던 한 걸인이 추위를 피해 짚더미 속에 기거하였는데, 우연히 그곳에 따뜻한 김과 물이 솟아올라 마시고 몸을 씻었더니 신기하게도 문둥병이 나아져, 이 사실을 알게 된 동민들이 그곳을 파헤치니 온천물이 솟아올랐다. 이 소문이 퍼져 사방에서 피부병 환자와 문둥병 환자가 몰려와 인심이 나빠지고 주민들이 불안하여 묻어 버렸다고도 하며, 조선조 숙종 임금도 이곳에 행차 피부병치료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첫 현대식 장비로 개발한 것은 1929년 일본인이 깊이 120m의 1호 공을 뚫어 온천수를 개발하였고 2호 공은 중원군에서 1964년 뚫었으며 하루 약 5,000톤의 물이 각 여관으로 공급된다. 수온은 약 53℃로서 단순유황, 라듐 천으로 피부병, 신경통,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담배의 유래-

서기 1492년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래 아메리카의 원산인 담배가 세계 각지에 퍼졌으며 우리 나라에는 조선 15대 광해군때 일본으로부터 들어와 각처에 시험 재배해 본 결과 담배 주산지인 미국 버지니아주와 기후와 토질이 비슷한 충청북도 충주와 중원군 일원에 처음 재배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세계사 (중원군 상모면 미륵리)

월악산과 조령산의 중간 계곡에 위치한 미륵사지는,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 제건이 창건하였다고도 하며, 신라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중 이곳에 절을 창건하고 머물러 갔다고도 전하는데, 절터에 주춧돌과 석불, 석등, 석탑 등의 흔적에서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측하나 몽고 난으로 폐허가 도어 버려진 것을 6·25이후 조그만 암자를 지어 세계사라 부르며, 중원 문화권 개발과 국립 공원 월악산의 개발에 힘입어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보물 96호로 지정된 석불 입상은 높이가  10.6m이며 6개의 화강암을 쌓아 올려 불상을 조각하였고, 신기한 것은 몸체 다른 부분은 이끼가 기고 색이 변하지만 불상의 얼굴은 수백 년이 흘렀지만 분칠한 것처럼 우유빛을 띤다고 하며 보물 95호인 5층 석탑과 석등, 돌거북 그리고 온달 장군이 국경 경비중 휴식을 취하며 놀이할 때 사용했다는 공기 돌이 있다.

 

월악산

해발 1,097m의 월악산은 1984년 12월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덕주골과 용하구곡 또한 송계계곡 등과 잘 조화된 산림들이 아직까지 많이 안 알려져 자연경관이 좋으며 인근에는 신라 마지막 왕자와 공주인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머물러 갔다는 미륵사지와 덕주사 등이 있으며, 단양팔경과 수안보온천을 엮어 앞으로 많은 발전이 있을 곳이다.

 

화양동구곡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속리는 법주사요, 수석은 화양이란 말과 같이 화양동은 맑은 물과 깨끗한 돌이 많아 유명하며, 더명산과 낙영산을 기고 흐르는 약 4㎞의 협곡으로 계곡 양쪽에 오랜 세월 비바람에 견디어 온 노송이 울창하게 하늘을 가리며 금 같은 모래가 보인다는 금사담과 용이 누웠다가 승천했다는 와룡대, 신선이 학과 같이 놀았다는 학소대, 구름의 그림자가 아름다운 운영락 등의 절경 아홉 개를 우암 송시열 선생은 화양동 구곡이라 불렀으며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박달재

천둥산 박달재는 해발 453m로서 고려대는 거란 군과 몽고 군을 여기서 물리쳤으며, 조선 6대단종 임금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임금에 올랐지만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갈 때, 박달재 정상에 올라 밝은 달을 바라보며, 자기의 운명을 생각하고 슬피 울었던 고개이며, 경상도 땅에 박달이란 총각이 한양으로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 집에 금봉이라는 아름다운 처녀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알성 급제하여 다시 찾아올 것을 약속하고 헤어질 때 금봉은 허리춤에 도토리묵을 달아주며 꼭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올 것을 빌었다.

한양으로 온 박달은 공부를 하려고 책을 펴면 금봉이 얼굴이 아롱거려 공부는 안되고 과거는 보면 떨어지니, 어느덧 수삼 년이 흘러 돈은 떨어지고 거지꼴이 되어 금봉이나 한번보고 죽자고 내려오다가 고개 정상에 이르러 자기 처지를 생각하니 금봉이 볼 면복이 없어, 금나 고개 밑 절벽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한편 과거 보러간 박달 총각을 기다리던 금봉은 몇 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박달 총각이 보고 싶어 시름시름 앓다가 상사병에 걸렸는데, 하루는 고개 마루에[ 꼭 박달 총각이 올 것 같아 그곳에 나가니 허공에서, 박달의 얼굴이 아롱거리며 금봉아 금봉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따라 가면서 발을 헛딛어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었다. 그 후 사람들은 박달 총각과 금봉이의 애달픈 사랑의 이야기를 따서 박달재라 불렀다 한다. 또한 이곳은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노래를 박재홍씨가 불러 더욱더 유명한데, 지금으로부터 약 40년전 유랑극단 시절, 반야월 김교성 선생님이 박달재를 지날 때 어느 한 여인이 슬피 울고 있어, 그 사연을 물은 즉 집이 너무 가난해 남편이 서울로 품팔이라도 하려고 떠났는데, 쌀이 없어  도토리묵을 쑤어 도시락으로 싸 드린 것이 한이 되어 운다는 내용이었다. 이이야기로 작사 작곡 한 것이 히트되어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불려지고 있습니다.

 

탁사장

원주와 제천간 국도변 충북 재원군 봉양면 구학리에 위치하며 울창한 숲과 계곡의 맑은 물을 어부사의 창랑지수에 비유하여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는다고 예로부터 이곳을 탁사장이라 불러 왔고 탁사장이라는 정자를 세웠으며, 물고기가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여 한꺼번에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자루바위 또한 용이 등천하였다는 용소와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에 노닐 때 갑자기 소낙비가 내려 비를 피했다는 은선암 등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다.

 

제천 의림지(제천시 모산동)

삼국시대에 축조된 저수지로서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아울러 세 개중 하나인 의림지는 본래 임지라 하였으나 서기 992년 고려 성종때 군, 현을 개칭할 때 지금의 제천이 의원현 또는 의천으로 바뀌니 체천의 옛 이름을 따서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다. 명확한 축조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때 고구려 왕산악, 조선의 박연과 더불어 우리 나라 3대 악성인 우륵이 시축 하였다고도 하고, 일설에 의하면 그로부터 700년 뒤 현감 박의림이 축조하였다고도 한다. 조선 세종때 충청도 관찰사 정인지가 수축하였고 그후 여러 차례 개축 오늘에 이르며 호수 둘레가 1.8㎞, 만수 면적이 15정보, 수심은 8m∼13m이며 1807년 세워진 영호정과 1948년 세워진 경호루가 있으며, 이 지방사람들이 공어라 부르는 물고기가 동지를 전후로 나타나 얼음이 녹으면 없어지는 희귀한 어종으로 산채로 초고추장을 찍어 먹으면 진미가 난다고 한다.

 

단양

소백산맥과 남한강을 끼고 있는, 우리 나라 8대 명승지의 하나인 단양은 석회석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시멘트가 많이 생산되며 마늘의 명산지이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단양 팔경,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도담삼봉, 석문, 사인암, 구담봉, 옥순봉 등이 유명하며 고수동굴, 천동굴, 노동굴 등의 관광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1985년 10월 충주댐의 완공으로 구 소재지는 수몰되어 신 단양으로 이주 새로운 호반 도시가 되었다.

 

노동굴

최근에 발견되어 1978년 개장되었고 석회암에 형성된 종유 동굴이며, 생성된 것은 5억년 전으로 보이고 구조 형태는 상중하로 나누며 40°∼60°의 급경사로 이루어졌으며 길이는 1,000m에 불과하나 희귀종, 동굴생물이 풍부하고 불곰의 뼈와 토기 류가 있다. 석순, 석주, 종유석의 다양함과 호화 찬란함이 높이 평가되어 천연기념물 26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고수동굴 (단양군 대강면 고수리)

고수 동굴은 문헌상 기록은 없으나, 정감록에는 금마굴 또는 까치굴, 박쥐 굴이라 하였고, 고수동굴이라 부른 것은 1592년 임진왜란 때 한양에서 피난길을 떠난 밀양 박씨 형제가 아우는 청주에 정착하고, 형은 안식처를 찾아 계속 소백산 쪽을 향하여 길을 재촉하던 중, 말의 발병에 더 이상 가지 못하고 키가 큰 풀이 우거진 이곳을 보고 고수가 우거졌구나 하며 탄식하고 정착하여 고수리라 하였는 것이 지명이 되었으며, 약 5억년의 연륜을 가진 이 동굴은 종유석이 빗어내는 갖가지 아름다움에 찬탄을 금치 못하며, 유신 학원에서 개발 1976년 개장하여 천연기념물 25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천동굴 (단양군 대강면 천동리)

대강면 천동리에 위치한 이 굴은, 소백산맥 연화봉 북서쪽에 위치하며 지구 표본에는 3대 유형의 동굴이 있는데, 첫째가 성류굴이나 고수굴 같은 석회암 동굴이요, 둘째가 화산으로 생기는 제주도 만장굴과 금녕사굴 같은 용암동굴이요, 셋째가 파도에 의해 생기는 파식 동굴이다.

그중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것이 석회석 동굴이다. 천동굴은 고수굴 보다 웅장한 감은 없으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과 파손되지 않은 종유석이 신비롭다. 1976년 박쥐 굴의 발견을 계기로 개발되어 여러 난관을 극복하여 비로소 신비함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구인사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소백산맥 깊숙이 단양군 영춘면에 자리한 천재종 구인사는 구제 중생이 란 뜻의 이름이며 1945년 상월원각 조사 님이 창건하여, 짧은 세월에 많은 교세를 확장 전국 사찰 중 최고의 신 도수를 기록하였고, 전국 최대 규모로 5층 대법당은 높이 33m 20억의 돈을 들였으며 넓이가 900평이라 하고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취사는 한번에 6,000명분의 밥을 할 수 있는가 하면 보일러 시설에 불을 때면 하루 약 80드럼의 기름이 든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자인 상월 원각 조사는 천태종 3대 지표를 애국 불교 생활 불교, 대중 불교를 내걸었고 실천 종교라는 것이다.

 

도담 삼봉

단양 팔경 중 제1경인 도담 삼봉은, 남한강 맑은 물위에 봉우리 세 개가 우뚝 솟아 물위에 그림자가 비치면 낭만적이며 가장 높은 봉우리가 첩봉 또는 남편 봉이며 이를 외면하고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이 처 봉이다.

 

삼천리표 한일 시멘트

1961년 창립되어 년 생산 40만 톤을 생산 경제개발 초기에 국가건설에 많은 힘이 되었고 여러 차례 증설공사를 하여 지금은 년간 약 290만 톤을 생산하고 하루에는 시멘트 약 20만포가 생산되어 8톤 트럭으로 8천대 분이나 된다.

 

천마표 시멘트

1967년 창립되어 부지 111만평 종업원 약 900명이 년간 약 265만 톤을 생산하여 하루 약 20만포의 시멘트를 생산, 국내는 물론 중동 및 남미지역에 수출을 하고 있다.

 

죽령재

영남에서 한양으로 넘어가는 3령의 하나인 죽령은 해발 697m이며, 경북과 충북의 경계 지점이기도 하다. 정상에 서면 멀리 풍기와 영주시가 보이며, 산정 연화봉에는 국립 천문 관측소가 자리잡고 있다. 옛날부터 길이 험하여 산적들이 자주 나타나 이 재를 넘을 적에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넘었다고 한다. 또한 왜정시대 목탄차를 타고 이 재를 넘어 가는데 큰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으니, 사람들은 잡아 먹힐까바 무서워 벌벌 떨기만 하였다. 그중 제일 나이 많이 먹은 사람이 나서서 호랑이는 한 사람만 밥이 도어 죽기로 하여, 웃옷을 던지니 호랑이는 어린 중학생 옷을 물어, 무정한 사람들은 중학생만 남겨 두고 떠나 버렸다. 학생은 꼼짝없이 죽을 줄 알고 겁이나 졸도를 하고 말았는데, 한참 있다 눈을 떠보니 호랑이는 온데 간데 없었다. 정신을 차린 학생은 걸어서 이 고개를 내려가는데, 한참 내려가다 보니 절벽 아래 목탄차가 굴러, 아까 가버린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 호랑이가 살려낸 이 학생은 커서 훌륭한 검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실화처럼 전해 온다.

 

다자구야 들자구야 전설

옛날 죽령에는 산세가 험하여 산적 떼가 많아 해가 지면 사람들이 무서워 넘지 못하였으며 밝은 대낮에도 삼삼오오 떼를 지어 넘어가야만 하였는데 이 산적에게 아들을 잃은 할머지가 사또를 찾아와 귓속말로 짜고서 죽령을 넘어가면서 디자고야 들자고야를 외치니 무서운 산적들이 나타났다. 할머니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큰아들 다자구와 작은아들 들자구가 돈 벌러 한양을 갔는데 보고싶어 찾아가는 길이니 부디 살려 달라도 사정하였지만 산적들은  소굴에 밥도 하고 빨래도 하는 사람이 필요해 할머니를 잡아가서 일을 시켰다. 며칠이 지난 후 산적 두목의 생일이 되어 밤이 이슥하도록 진탕 마시고 취한 산적들은 모두 잠이 들었는데 보초서는 도둑만 멀쩡하니 할머니는 제일 독한 술과 고기 안주를 가지고 밖에 보초서는 도둑만 멀쩡하니 할머니는 제일 독한 술과 고기 안주를 가지고 밖에 보초서는 도둑만 멀쩡하니 할머니는 제일 독한 술과 고기 안주를 가지고 박에 보초서는 도둑에게 아들을 생각해서 몰래 가져 왔으니 마셔보라 권하여 드디어는 그들도 골아 떨어지자 할머니는 다자구야 다자구야를 목청껏 외쳤다. 이때 밀 숨어있던 포졸들이 달려와 잠들어 있는 도둑들을 모두 체포하여 끌고가니 그후부터 죽령은 산적이 없어 안심하고 넘어 다녔으며, 할머니와 사또가 미리 짠 암호가 안자면 들자구야, 잠들면 다자구야 였으며 그후 이곳 사람들은 그 할머니를 다자구 할머니라 불렀으며 죽은 후에는 대강면 산신당에 모시고 매년 산신제를 지내 주었다.

 

국립천문대

연가 습기가 제일 적고 쾌청일수가 가장 많은 소백산 제2연화봉, 해발 1,390m에 자리한 관측소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60㎝ 반사 망원경을 비롯 20㎝ 재양 관측 망원경 등 현대 관측기들이 설치되어 별자리의 움직임 등을 연구하는 곳이다.

1973년 죽령재 정상으로부터 산길을 뚫는 공사부터 시작하여 1978년 9월 29일 준공하여 공사비 1억 4천 2백만 원을 들였다.  고씨가 불쌍해 첫술 밥을 고씨네 이름을 부르며 묘를 향해 던졌는데, 이 때문인지 전서방네 농사는 다른 해보다 갑절 잘 되었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논이나 밭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먼저 고씨네하고 첫술을 던졌는데 그렇게 한 사람은 모두 풍년이 들었다는 이야기로 널리 퍼져서 오늘날도 고씨네 또는 고시레로 불리며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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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