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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정주시

백제 때는 정촌현, 신라 때는 정읍현, 1589년 조선 선조때 정읍현의 소재지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초대 현감으로 부임하였으며, 녹두장군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시달린 농민들을 모아 우리 나라 최초의 민중항쟁을 벌였으며, 물맛이 좋아 우물 정자 정주는 1981년 7월 1일 시로 승격되었고, 호남평야에서 나는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특산물은 장구와 보리수 염주 등이 있으며, 인근에는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사가 있다.

 

내장산(정읍군 내장면 내장리)

남원 지리산, 영암 월출산, 장흥 천관산, 부안의 능가산과 함께 호남 5대 명산이며 대한팔경의 하나인 내장산은 해발 763m로서 노령산맥이 호남으로 내려오다 끝머리에, 한번 크게 솟구친 곳이라 하며 온 산을 덮은 굴참나무, 단풍나무, 떡갈나무 등이 곱게 물들면 전국 제1의 단풍경치를 자랑하며 서레봉, 장군봉, 신선봉, 연자봉 등의 봉우리가 병풍을 둘러친 듯 절경을 이루고, 내장사 입구 단풍터널의 장관과 가을 단풍이 너무 아름다운 추령, 일명 가을재를 넘어 백양사로 가는 고갯길은 내장산의 봉우리들이 눈 아래 보이며 아슬아슬하여 심장이 멎을 듯 하다.

 

내장사

서기 636년 백제 무왕때 영은조사가 창건하여 영은사라 하였고, 고려 15대 숙종때 행안 선사가 2창하였고, 조선 13대 명종때 희묵대사가 3창하였으나 정유재란때 병화로 불타고, 조선 16대 인조때 부용대사가 4창, 정조 때 영은 대사가 5창, 1925년 백학명 선사가 사찰을 벽련암 위치로 옮겨 벽련사라 하였는데, 서기 1938년 매곡선사가 현재의 자리에 절을 옮기고 내장사라 하였다. 6·25의 병화로 모두 소실되어 1974년부터 1977년까지 대규모로 중건되었다.

 

고창 선운사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해발 335m의 도솔산 일명 선운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이 사찰은 , 서기577년 백제 위덕왕 24년, 신라 진흥왕의 시주로 백제의 검단 국사와 신라의 의운국사가 창건하였으나, 폐사가 되어 석탑만 남아 있던 것을 서기 1318년 고려 충숙왕때 효정선사가 중수하였으나, 정유재란때 불타버린 것을 서기1613년 조선 15대 광해군때, 무장현감 송석주와 원준대덕이 함께 재건 대웅전, 만세루, 영산전, 명부전 등을 건립하였는데 조선 24대 헌종때 수재로 붕괴된 것을 찬성, 의홍 두 스님이 중건 오늘에 이르며 경내에는 보물 279호 금동보살 좌상과 보물 290호 대웅전 보물 280호 지장보살 등의 문화재가 있으며 절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 싼 수백년 된 동백나무 숲이 꽃을 피우면 장관을 이루며 천연 기념물184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신라 24대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왕비 도솔과 공주 중애를 데리고 선운산에 입산하여 수도하였다는 진흥굴과 검단국사가 선운사를 지을 때 이곳에 살던 용을 몰아내니 다급한 용을 몰아내니 다급한 용은 바위를 뚫고 서해 바다로 도망쳤다는 전설 어린 용문굴이 유명하며 절 입구 동구에는 이곳 출신 시인 마당 서정주 선생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비가 있다.

 

선운사 동구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단기 사천 삼백 칠년 선운사 동구에서

                           미당 서정주 지어 씀.

【전설】

어느 날 주도포에 돌배가 떠와서 사람들이 끌어올리려고 하면 바다 쪽으로 떠내려가곤 하였다. 소문을 들은 검단국사가 달려가 보니 배가 저절로 다가와, 올라가 본즉 배안에는 삼존 불상과 탱화 옥돌부처 등이 있고, 금, 옷입은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케 하리라 하니 본래 연못이 있던 현재위치에 용을 몰아내고, 터를 메워 절을 짓게 되니 신라 24대 진흥왕은 많은 시주와 장정 100명을 보내 역사를 돕게 하였고, 후에 왕위를 버리고 왕비와 공주를 데리고 입산 수도하였다 한다.

 

내소사 (부안군 산내면 석포리)

변산반도에는 옛부터 내소사, 개암사, 월명암, 청연암 4대 고찰이 있었다. 그중 제1사찰인 내소사는 염전으로 이름난 곰소 서북방 6㎞지점, 가인봉 품에 안겨 있다. 서기 633년 신라 27대 선덕여왕 2년에 혜구 두타가 창건하여 소래사라 하였고1633년 조선인조때 청민 스님이 중건하고 1902년 고종때 관해스님이 재차 중건하였다 한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유래는 당나라 소정방이 이곳에 와 시주하여 내소사라 고쳤다고 하나근거가 없다하며 절 입구에서 600m에 이르는 전나무 숲은 전국 제일이며 또한 전국 제일이라는 보리수나무도 볼만하다.

경내에는 보물 291호인 대웅전과 보물 277호 고려 동종 보물 278호인 법화경 사본이 보존되어있다.

【전설】

내소사 대웅전은 서기 1633년 조손 12대 인조때 청민선사가 중건하였는데 대웅전 중건에 대한 일화가 전하여 진다. 어느 날 청민선사는 선우라는 사미승에게 일주문밖에 나가면 도편수가 오셨을 터이니 모셔오라 하므로 나가보니 과연 일주문에 기대어 웬사람이 잠을 자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도편수는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재목을 자르기 시작하였는데 이상하게 기둥을 켜는 것도 아니고 서까래를 다듬지도 않았다. 거의 3년 세월을 나무란 나무는 모두 목침 만하게 토막을 내어 다듬는 것이었다. 본래 심통이 있는 선우사미승이 조놈의 도편수 삼년을 하루같이 법당은 안 짓고 목침만 깎고 있으니 좀 골려주어야겠다 하며, 몰래 나무토막 하나를 감추어 버렸다. 어느 날 나무 다듬기를 마친 도편수가 나무를 세는데, 세고 또 세고 수십 번을 세더니 눈물을 흘리며, 소승은 아직 법당을 지을 인연이 먼가 봅니다 하니 선사가 무슨 까닭인가 물었다. 제가 제목 하나를 덜 깎았습니다. 이런 주제에 어찌 감히 법당을 짓겠습니까 곁에서 듣고있는 사미승 깜짝 놀라며 감추었던 목침을 내놓고 용서를 빌어으나 도편수는 부정탄 제 목은 빼놓고 짓겠다 하여 빼놓은 채 지어 내소사 대웅전은 의당출목이 박혀 있어야 할 한군데 자리가 지금도 빠끔히 비어 있다. 법당을 짓고 나서 단청을 칠하려 화공을 불러와 법당 안을 그리게 하였는데 화공은 그림을 그리는 100일 동안 아무도 법당을 들여다보지 말도록 단단히 일렀다. 이번에도 장난꾸러기 선우 사미승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 99일째 안을 들여다보니 법당 안에는 화공은 없고 다만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불고 이리 저리 날아다니며 그리고 있어 사미승은 넋을 잃고 쳐다보는데 인기척을 느낀 황금 새는 놀라 문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내소사 법당그림은 양쪽에 한 쌍이 그려졌어야 할 용과 선녀그림이 왼쪽 것만 그려지고 오른쪽 것은 빈칸으로 남아있는데 그것은 꼭 하루 걸려 그릴만큼 빈칸이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도편수는 호랑이가 화현한 대호 선사이며 황금빛 새는 관음보살의 화현이었다고 한다.

 

고려동종

보물 277호로 지정되어 내소사에 보존되어 있는 동종은, 원래 청림사에 있던 동종이었는데, 절이 폐사되고 분실되었다. 서기 1853년 조선 철종때 청림사 절터에 최씨 문중에 제각을 세우려고 땅을 파다 이 종을 발견하였는데, 이상하게 종을 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두들겨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누구라도 종을 쳐 소리를 내는 사람이 가져가기로 하였는데, 내소가 스님이 종을 치니 소리가 나서 종은 내소사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이 동종은 서리 1222년 고려23대 고종 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종에 기록되어 있어, 확실한 연대를 알수 있고 높이 180㎝, 지름68㎝, 두께5㎝의 고려시대 동종의 대표작이다.

 

채석강

격포 항 오른쪽 닭의 봉 일대를 채석강이라 하는데 수성암이 단층을 이뤄 마치 책을 여러 수만 권을 쌓아 올린 듯 장관을 이루며, 이곳을 채석강이라 부르는 것은 당나라대의 시인 이태백이 술에 취해 뱃놀이를 하다가 강물에 뜬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 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비슷하다고 하여 그 이름을 따서 채석강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방 기념물 28화로 지정되었다.

 

적벽강

적벽강은 채석강 바로 옆 죽막마을 북쪽을 이야기하는데, 붉은 색을 띤 절벽이 약 2㎞이며 석양의 햇볕을 받아 바위가 진홍빛으로 물들 때가 가장 아름다우며, 송나라때 시인 소동파가 적벽강에서 놀았다는 중국의 적벽강에서 따온 이름으로 지방 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평저수지 옆 흠치교 절

오리알 터라고 불리는 산기슭에 흠치교의 시조 증산 강일순이 세운 절이며 강일순은 모악산 대원사에서 수도를 하다가 득도하여 유교와 불교를 종합한 흠치교를 창설하고 억눌리고 불행했던 그대의 대중들에게 깊이 파고들어 안 때 무서운 기세로 번졌다. 1909년 38세로 죽을 때까지 포교하였으며, 지금도 보화교와 증산대도회 1만5천여 신도가 있어서 흠치교의 증산 사상을 전하고 있다.    

 

모악산 금산사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해발 794m의 모악산 정상에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주는 형상의 바위가 있어 어미 모자를 써 모악산이라 했다는 말도 있고 이산에서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금평 저수지에 모였다가 김제 평야에 어머니 젖과 같이 풍부한 물을 공급하여 모악산이라고도 했다 한다. 이 산의 서편 기슭에 자리한 금산사는 서기 599년 백제 29대 법왕대 왕의 복을 비는 사찰로 세워졌지만 적은 규모였고 서기 762년 신라 경뎍왕때 진표율사가 크게 중창 대가람이 되었다. 그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서기 1598넌 조선 선조 임금때 정유재란으로 모두 불타 1601년에 수문대사가 금산사 재건에 착수 35년 만인 1635년 인조때 준공되었다. 또한 후백제 시조 견훤이 왕위를 넷째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장남 신검이 동생을 죽이고 왕인 견훤을 금산사 미륵전 지하실에 가두어, 장사 30명으로 지키게 하였으나 3개월만에 장사들에게 술을 먹이고 탈출, 나주에 가서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고 힘을 빌어 신검을 치니 후백제는 멸망하였다는 역사적 이야기가 있으며, 국보 62호 미륵전은 겉모양은 3층이나 내부는 전체가 통한 특이한 건물이며 옥내에 입불로는 세계에서 제일 큰 11.82m 높이며, 견훤이 갇혔다는 미륵불 밑 지하에는 가마솥 모양의 무쇠덩이가 있는데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금산사를 찾는 이들은 모두 한번씩 만져 본다고 하며, 경내는 고찰답게 국보1점을 비롯하여 보물 9점이 보전되어있다.

 

전주

후백제의 도읍이자 조선왕조를 세운 전주 이씨의 발원지이며, 후백제 때는 완산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때 전주라 개칭하여 1895년 고종 32년 군이 되었고 1949년 시로 승격 호남지방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서 도청소재지이며 맛으로 이름난 비빔밥과 콩나물 해장국, 합죽선, 태극선이 유명하다.

 

덕진공원 호반

서기 1080년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도성 방위를 위해 늪을 만든 이래 오늘의 호반이 되었으며 연꽃이 호반을 수놓아 덕진 채련이란 말로 표현도 하며 매년 단오가 되면 부녀자들이 창포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여 한 해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는 풍습이 내려오는 연못이기도 하다. 인근에 전주 이씨 시조 이한공의 묘소, 조경단과 전북 대할이, 울창한 숲과 호반이 어울려 아름다운 도시 공원이 되었다.

 

풍남문

보물308호이자 전주의 상징인 풍남문은 서기 1389년 고려 공양왕때 관찰사 최유경이 창건하였고 1597년 조선 선조때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것을 1734년 영조때 관찰사 조현명이 다시 건축 1767년 소실되고 관찰사 홍낙인이 재건하여, 전주가 조선왕조를 세운 전주 이씨의 발상지라 하여, 한나라 고조 고향인 풍패를 따서 풍남문이라 하였다.

 

경기전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서기 1410년 태종때 지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어용전이라 불리다가 세종때 경기전이라 개명하고, 영정도 이때 새로 그렸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참봉 오희길과 선비 손홍록이 영정을 받득고 내장산, 아산,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에 봉안하였다가 서기 1614년 광해군대 묘향산에서 경기전으로 호송 봉안하였다. 국난에도 태조 영정은 무사하였으나 1872년 고종때 영정이 오래되어 낡았다고 새로 그려 봉안하고 400년을 보존해 왔던 영정을 불살라 버려 국보급 문화재가 사라져 안타깝다. 경내에는 조상들의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는 시립 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

 

관촌 사선대 (임실군 관촉면 관촌리)

약 2000년 전 화창한 봄날 진안 마이산 두 신선과 임실 운수산 두 신선이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와 맑은 물에 감탄하며 타경에서 볼 수 없는 선경이라, 목욕하고 넓은 암석에서 바둑을 두고 즐기는 데 이곳을 날아가던 까마귀 데들이 내려와 같이 놀았으며 마침내 네 신선은 구름을 타고 승천하였다. 그 후에도 신선들이 향유 라였다는 전설로 인간들은 사명을 사선대 강 명을 조원강이라 하였으며 신선들이 놀았던 넓은 바위를 놀음바위라 하고 이근 동명을 조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수 의견비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옛날 이곳에 김개인 이라는 사람이 개를 몹시 사랑하였다. 하루는 장터에 나가는데 개도 다라 나섰다. 김개인은 한잔 두잔 마신 술이 몹시 취해 걸어가다 길가에 쓰러져 잠이 들어 버렸는데, 마침 들에 불이나 쓰러진 주인 곁으로 불이 번지니, 기는 냇물로 뛰어가 풍덩 물에 적셔 주인 주위의 풀이 물에 젖게 계속 반복하여, 마침내 개는 기진맥진하여 죽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난 김개인은 온몸에 물이 젖었고 자기가 누운 자리만 안타고 개는 죽어 있어, 감동하여 슬픔을 표하고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지팡이를 꽂아 표시를 하였더니 지팡이에서 싹이 터서 잎이 피어, 비록 개이지만 불에 타죽을 주인을 구하고 대신 죽은 충견을 찬양하기 위해 의견비를 세우고, 이곳 지명을  큰 개 오자 오수라 칭했다 합니다.

 

남원 만인의 총

임진란 초, 호남 곡창을 침범하지 못해 고전을 한 왜군은 1597년 전라도를 침공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정유재란을 일으켜 남원성을 약 5면의 군사로 쳐들어 올 때 전라 병사 이복남, 구례부사 이원춘과 남원 부사 등이 교룡 산성으로 나아가 지리적 우위를 지키자고 했을 때 명나라 원군 장수 양원이 넓은 남원성에서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교만을 부려 우리 군사1,000여명, 명나라 군사 4,000여명, 민간의병·부녀자·노약자 합해 만명이 5만의 왜군을 맞아 혈전분투 하였으나 중고하부족으로 모두 몰사하였다. 이때 명나라 장군 양원은 도망을 갔다. 명나라에서는 양원을 도망병으로 간주 목을 잘라 우리 나라 조정에 바쳤고, 전쟁이 끝난 후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 들이 1만여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니 서기 1612년 광해군 대는 충열사를 건립 추모하였으며 효종임금은 충열이라 사액하였다. 만인의 총은 원래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1964년 현 위치로 이장 성역화 하였고, 기념관을 경내에 건립 정유재란 당시 전황기록과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남원

이 도령과 성 춘향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와 목기, 태극선, 남원 칼이 유명한 이 곳은 신라 35대 경덕왕때 남원으로 불렀으며, 1931년 읍으로 1981년 7월 1일 시로 승격되었으며, 인근에 지리산이 있고 광한루가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입니다.

 

광한루

조선조 태조 때부터 4대 세종 임금까지 네 분의 임금을 모셨던 명 정승 황희가 누명을 쓰고 남원으로 유배 와서 누각을 짓고 광통루라 하였고, 서기 1444년 세종 26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이곳에 와서 아름다운 경치에 달나라 궁궐 광한 청허부 같다고 감탄하여 광한루로 개칭하였으며, 1461년 세조 임금때 부사 장의국이 요천강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고 오작교를 놓아 지금과 같은 모형이 되었고,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의 장소였던 광한루는 보물 281호로 지정되었으며, 춘향의 영정을 모신 춘향사와 오작교의 잉어 떼를 보고 월매집의 동동주 한 잔 마시고 그네를 타면 이도령과 춘향이가 되는 기분입니다.

 

구룡계곡

주천면 호경리에서 용이 승천하였다는 구룡폭포까지 약 4㎞이르는 계곡을 말하며 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에 울창한 수목과 절벽의 바위가 어울려 아름다우며,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 뒤편에는 춘향이의 묘소가 있습니다.

 

순창

신라 때는 순화군 고려대 순창이 되었으며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임금 되기 전부터 이 부근에 살고 있는 무학대사를 만나러 가다가 어느 농가에서 점심 대접을 받을 때 먹어본 고추장이 맛이 있어 잊지 못하다가 임금이 된후 순창 군수에게 고추장을 올려 보내라 하면서부터 궁중에 진상품이 되었다는 순창 고추장은, 이 지방 특성의 토질과 기후가 좋아 양질의 고추와 콩이 재배되어 정성껏 담근다는 것이며 맛이 좋아 서울등지의 유명 백화점에도 납품된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심산 유곡에서 나는 고사리는 연하고 맛이 있어 유명합니다.

 

실상사

신라 선무구산 중 최초의 사찰인 실상사는 지리산 영기 어린 천황봉 서쪽의 평지에 지어진 사찰로서 서기 828년 신라 흥덕왕때 흥척선사가 창건 2대 수철화상 3대 편운대사에 이르러 크게 중창하였다. 서기 1468년 조선 7대 세조때 화재로 손실, 200년 동안 폐사나 다름없이 근근히 이어오다 서기 1690년 숙종때 3백여 승려가 다시 모였고, 침허대사가 나라에 상소하여, 절터를 되찾아 30여동의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882년 고종때 함양출신 양재묵과 산청출신 만동혁의 사심으로 소실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여러 스님들의 힘으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불에 타지 않는 석조물들은 구대로 보전되어 국보 1점과 보물 11점이 있으며 보광전 안에 범종이 있는데 조선 18대 현종때 만든 것으로서 종목을 치는 자리에 일본 지도모양의 무늬가 있어 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떠돌아 일제때 순사가 주지를 잡아가 문초하는 소동도 있었다 하며,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에는 우리 나라 당의 정기가 지리산 천황봉을 거쳐서 일본으로 흘러간다고 써 있다.

그것을 막기 위하여 실상에 4천근이나 되는 약사여불(보물 제41호)을 봉안했으며 삼층 쌍석탑(보물 제37호)과 지금은 화재로 주춧돌만 남아있는 장육전에 5층 목탑을 세워서 지맥을 눌러 놓았다고 한다.

 

뱀사골 (남원군 산내면)

뱀사골은 산내면 반선에서 12㎞의 계곡을 말하는데 봄 철쭉과 가을 단풍설악산과 내장산을 한데 묶은 것처럼 아름다우며, 크고 작은 폭포와 태고의 원시림이 어울려 절경이 펄쳐지고 한 여름에도 계곡에 발을 담그면 발이 시릴 정도로 차거우며 이 부근에는 지리산 약초의 이슬과 곤충을 먹고 자란다는 약뱀이 많이 서식하나 그렇다고 뱀사골이 아니고 옛날에 이곳에 배암사라는 사찰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계곡 중간쯤에 뱀소가 있어 뱀이 살아 움직이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뱀사골 전설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 년전 현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자리에 송림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일년에 한번 칠월 백중날 자정에 신선바위에서 기도 드리면 신선이 되어 승천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젊은 스님들이 해마다 한 명씩 신선바위에서 기도를 하러 떠나가면 돌아오지 않아 모두 신선이 되어 승천한 것으로 알았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긴 고승이 임금님께 상소를 올렸더니 임금님께서도 이상하다 하시며 극약을 묻힌 옷 한 벌을 하사하시어 고승은 옷을 가지고 송림사로 돌아와서 칠월백중날 기도하러 떠나는 스님에게 그 옷을 입고 떠나라 하면서 몰래 옷에다 명주실을 바늘에 꿰어 꼽아놓고 스님이 가는 대로 실꾸리를 풀어주고 기다리는데 그날 새벽 괴성과 함께 천지가 무너지는 듯 요란하다 잠잠해진 뒤 고승은 신선바위에 올라가 보니 기도 드리던 스님은 간 곳이 없어 명주실을 따라 찾아 가 본 계곡  용소에는 용이 못된 이무기가 극약 바른 옷을 입은 스님을 잡아먹고 몸부림치다 죽어 있었다. 그후 이 계곡을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골이라 하며 스님들의 반은 신선이 되었다고 이곳 마을을 반선이라 부르고 있다는 전설이다.

 

지리산 전적기념관

1950년 6·25동란 당시 북괴군이 유우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보급로와 퇴로가 차단되자 그 일부 병력이 지방 공비와 합류 험준하고 광활한 지리산으로 잠입하여 약 2만 명의 공비들이 지리산 주변 마을을 습격 양민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잔인한 수법으로 게릴라전을 자행하지 우리의 국군과 경찰이 5년 6개월 동안에 걸쳐 이들을 완전히 소탕하면서 아군의 희생자도 6,300여명에 이르러 이들 용사의 숭고한 충혼을 기리고 공비들의 만행실상을 알리기 위해 당시 격전지였으며 공비들의 본거지였던 이곳 뱀사골에 1979년 11월에 기념관을 세우고 당시 사용했던 아군 무기 및 공비들의 무기, 토벌상황판, 도한 만행 현장의 사진 등을 전시하였다.

 

진안 마이산 (진안군 마령면 동천리)

신라 때는 서다산, 고려대는 용출산이라 불렀고, 조선 태조는 산이 금을 묶어 놓은 것 같다고 속금산이라 하였는데, 조선 3대 태종임금이 이산에 올랐다가 하산하여 진안에 이르러 바라보니 꼭 말귀와 같은지라 산 이름을 말 마자 구이자 마이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조금 뾰족한 숫마이 봉은 해발 673m이고 펑퍼짐한 암마이봉은 667m이며, 계절에 따라 봄에는 안개 속에 뾰족이 나온 두 봉우리가 쌍돛대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봉, 가을에는 마이봉, 겨울에는 문필 봉이라 불렀고 콘크리트로 만든 산 같으며, 암벽의 바위 구멍마다 비둘기가 서식하여 평화로우며 숫마이봉 중턱에 화암굴이 있는데 그 속에 약수가 있어 아들 못 낳는 사람이 이 약수를 마시면서 100일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로워진다고 하고 암마이봉 밑에는 탑사가 있다. 1860년 임실군 둔남면서 출생한 이갑룡처사가 25세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과 생식을 하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전국 명산의 돌을 날라다 10여 년을 걸려 천지, 음양, 이치와 팔진 도법으로 80여기의 만 불탑을 쌓아 올린 것으로 아무리 거센 폭풍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으니 현대의 기술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며 용화세계 억조창생의 구제와 만인들이 짓는 죄를 대신하여 비는 기도를 드리며, 신의 계시로 부적을 쓰고 신서를 남겨 훗날 이 글을 해독하는 자가 나타날 것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전설】

남녀 두 산신이 이 고원에서 아이를 낳고 살다가 하늘로 승천할 때가 되어 의논을 하였다. 우리가 승천하는 것을 아무도 보아서는 안되니 캄캄한 밤중에 올라갑시다. 남신이 말하니 여신이 밤중에는 무서워요 낮에 떠나는 것이 좋아요 하였다 . 결국 여신의 말을 듣고 이른 새벽에 떠나기로 결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하늘로 승천하는데 마침 동네 아낙네가 물 길러 나왔다가 하늘에 둥둥 떠가는 산신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치는 바람에 부정을 타 떨어져 주저앉은 것이 마이산이 되었다. 여신 말을 들어 승천에 실패한 남편 신이 화가 나서 등을 돌려 앉았고, 탑사 앞쪽에 나도산이 있는데 두 산신이 승천할 때 나도 산신인데 하며 따라 올라가다 같이 떨어져 산이 되어 나도산이 되었다고 합니다.

 

덕유산 무주구천동

나제통문 :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을 가로지르는 산줄기의 암벽을 인공으로 뚫어 만든 문이데, 옛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선으로 나라간의 사신 왕래와 교역의 통로로 사용되어 왔고, 지금도 이 통문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가 확연히 구별되며 이 부근 경치가 좋아 덕유산을 가는 이들이 한번쯤 쉬어가며 덕유정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구천동

1975년 2월 1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해발 1,594m의 덕유산은 무주, 장수 거창, 함양, 4개군 8개면에 걸쳐 북으로는 구천동, 남쪽으로는 지리산과 이어지며, 구천동 계곡의 아름다움과 가을 단풍은 절경이며, 이곳의 유래는 조선 초 명나라 명월공주가 덕유산 일대에 14개 암자를 지었는데, 상주하는 승려가 9,000명이나 되었다고 구천동이라 했고, 이 많은 스님들의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으면 온 냇물이 살 뜨물이 흘러 눈같이 희다고 눈 설자 설천면이라 했다고도 하며, 이 골짜기에 구씨 집안과 천씨 집안이 살았는데 대대로 내려오면서 집안 싸움으로 사이가 나빠 어사 박문수가 해결하여 화목하고 단결하며 살아가도록, 구천동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서기 830년 신라 42대 흥덕왕때 무임국사가 창건하였다는 백련사가 산중턱에 있습니다.

 

익산군 금마면 미륵사지

백제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에 올랐다가, 이곳 연못가를 지나는데 홀연히 미륵삼손이 나타남을 보고 못을 메워 절을 이룩했다는데, 이때 신라 진평왕이 석공을 보내어 석탑건립을 도왔으며, 조선조 연산군대 폐허가 되어 지금에 이르며 문화재 관리국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있고, 국보 11호인 미륵 탑은 본래 높이 13.5m의 7층 혹은 9층으로 짐작하나 뇌진으로 반파 1915년 현 모습대로 복구했다.

목조 탑을 모방하여 기단 없이 바로 탑신을 세워 올려 동양최대의 석탑이었으며 절터에는 보물236호인 당간지주가 다른 절과는 달리 두 개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익산 왕궁탑

호남고속도로 이리 톨게이트를 지나면, 금마면 쪽으로 나지막한 야산에 우뚝 솟은 5층석탑을 볼 수 있다.

이 탑은 백제시대 궁터로 알려진 왕궁평에 자리잡고 있어 왕궁탑이라 불이우며 높이가 8.5m로 보물 44호로 지정되어 있고, 탑이 기울어 1965년 해체 복원 공사를 할 때 금제 사리함과 불경, 청동여래 입상이 발견되어 국보 123호로 지정되어 중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대둔산

노령산맥 줄기로 해발 877m이며, 전북 완주, 충남 논산, 충북 금산 등 2도 3군에 걸쳐 기암 절벽으로 천하절경을 이룬 곳이 대둔산이며 100m의 절벽에 임금 바위와 입석대를 연결하는 길이 50m의 금강 조교 구름다리는 건너가면 아찔하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스릴이 있으며 선도 대사가 수도할 때 용이 문을 열고 승천하였다는 용문굴 또한 용이 승천할 때 일곱 개의 별이 떨어져 일곱 개의 봉이 되었다는 칠성봉, 또한 원효대사가 아름다운 절터를 발견하고 너무너무 좋아서 3일 동안 덩실덩실 춤을 추어 창건하였다는 태고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임진란때 권율장군이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는 배티고개가 있습니다.

【태고사 전설】

강경땅에 한 어부가 고기잡이 갔다가 풍랑을 만나 무인동 표류하였더니 고결한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한사람은 원효대사요, 또 한 분은 고운 최치원이었다. 어떻든 어부는 허기져서 밥을 애걸하니 불궤와 단지를 주면서 이 단지는 백명이 먹어도 그만 2백명이 먹어도 그만이니 항해도중 요기하도록 하고 무사히 돌아가거든, 단지는 바다에 띄우고 불궤는 대둔산 태고사에 갖다 주어라 하면서 내어주고, 한편으로는 관음상을 조각해 주면서 뱃머리에 앞세워 가면 풍랑이 없으리라 하였다.

욕심난 어부는 단지를 몰래 가져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더니 갑자기 풍랑이 이는지라 비로소 깨닫고 죄를 빈 뒤에 뭍에 닿자 단지는 바다에 띄우고 불궤를 태고사에 갖다 바치며 지난 이야기를 하였더니, 주지 스님은 며칠전 갑자기 절에 있는 불궤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소동이 났었는데, 어부가 메고 온 것이 이 절의 불궤였다는 것이다.

그후부터 강경에 사는 어부는 해마다 태고사에 감사하는 뜻으로 소금을 바쳤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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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