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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지리산

해발 1,915m로서 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 높은 산으로, 1967년 12월 29일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었고 경남, 전남, 전북 3개도 5개 군에 걸쳐 둘레가 약 800리나 되는 방대한 산이다. 옛부터 3신 산의 하나로 추앙 받았으며 지리산 팔경 즉 천왕봉 일출, 반야봉 낙조, 세석 철쭉, 노고단 운해, 벽소령 야월, 불일폭포, 연하선경, 피아골 단풍의 절정은 가히 천하 절경이라고들 한다.

 

화엄사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해발 1,506m의 노고단 기슭에 자리한 이 사찰은 서기 544년 신라 진흥왕때 연기 조사가 창건하였고, 임진왜란때 모두 소실된 것을 서기 1630년 조선 16대 인조 임금때 벽암 대사가 폐허의 화엄사를 다시 일으켰고, 그 뜻을 이어받은 계파 성능 선사가 각황전을 완공하였으니, 경내에는 천연기념물38호인 올벗나무와 국보 67호 각황전, 국보 12호 석등, 국보 35호 4사자 3층석등, 보물 132, 133석탑, 보물 300호 사자탑, 보물 299호인 대웅전 등의 문화재가 있다.

 

각황전 유래

장육전 중건의 대원을 발한 계파 대사는, 벽암 대사의 제자로서 스승이 못 다한 일을 이루고자 축수승을 시봉하는 공양주로 자원하였다. 계파는 온갖 정성을 다해 바치고 물길으며 대중 스님들을 공양하였다. 이윽고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노스님이 대중에게 말하기를,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장육전을 중건하는데, 화주승을 뽑으려면 시험을 물 묻은 손으로 밀가루를 만져서 묻지 않은 사람이 화주승이 되어, 장육전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스님들도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다면서, 이것이 바로 문수대성의 유촉으로 알고 그대로 시험하니, 사내 모든 스님들의 손에 밀가루가 묻으니 마지막으로 부엌에서 대중을 시봉하는 계파의 차례가 되어 두손에 물을 묻혀 밀가루 독에 손을 넣어보니,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았다. 세 번이나 계속하여도 마찬가지였다. 대중들은 모두 일어나 계라에게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의 화주의 중임을 맡기니, 계파는 밤새껏 대웅전에 정좌하여 기도를 올리니, 밤중에 한 노인이 나타나 그대는 걱정 말라 내일 아침 여기를 떠나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하고 사라졌다. 계파는 용기를 내어 다음날 새벽, 아무도 몰래 화주 책을 품속에 간직하고 산을 내려 한참 가니 그의 앞에 한 거지 노파가 절을 향해 오고 있었다. 이런 거지 노파에게 어떻게 장육전을 지어 달라고 권한단 말인가, 그러나 간밤에 무수 대성의 계시가 있어, 그 노파에게 어떻게 장육전 건립 시주를 권하며 절을 계속하니 아무 것도 없는 거지 노파는 도망을 다녔다. 그러나 계속 절을 하며 사정하는 계파의 정성에 노파는 눈물 흘리며 화엄사를 향해 합장하고, 이 몸이 죽어 왕국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이룩하오리니 부디 문수 대성께서는 가피를 내리소서 하고는 동네 입구 큰 연못에 풍덩 빠져 죽어버리니, 너무 갑작스런 일에 놀란 계파는 내가 사람을 죽였구나 하며 어디론가 정처 없이 걸식하며 5∼66년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해 한양성에 도달하여 창덕궁 앞에 서성거리다가 유모와 함께 궁 밖을 거닐던 어린 공주와 마주쳤다. 공주는 계파를 보자 반가워 어쩔 줄 모르며, 우리 스님이라 하며 매달렸다. 그런데 공주는 태어나서 6년이 되도록 손을 펴지 않아, 나라에 큰 근심이었는데 갑자기 퍼지니 손바닥에 장육전이란 글씨가 쓰여 있어, 이 소식을 들은 조선 19대 숙종 임금은 계파를 불러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동한 임금은 장유전 건립에 크게 시주하고, 장육전이 완공되자 각황전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즉 황제가 깨달았다 라는 뜻이다.

 

섬진강 유래

섬진강은 전북 진안군 백운면 봉황산에서 시작하여 곡성, 구례, 하동을 거쳐 남해 바다로 흘러가는 길이 220킬로미터이다. 본래의 강 이름은 두치강이었는데 서기 1383년경에 개명되어 섬진강이 되었으나 이 지방 사람들의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이 강을 다라 쳐들어오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나타나 길을 막으니 이를 본 왜군들이 질겁을 하고 달아나 이 고장이 무사하여 주민들이 고마움에 두꺼비 섬자를 써서 섬진강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며, 물살이 빨라 바위와 자갈이 씻겨 내려가 하류 하동에는 질 좋은 모래가 퇴적되어 남해고속도로 섬진강 휴게소 부근 강에는 모래 채취선이 항상 물위에 떠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천은사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서기 828년 신라 42대 흥덕왕때 범승 덕운조사가 창건, 감로사라 하였는데, 감로사라 한 것은 이 절에 달콤한 이슬처럼 맑은 샘물이 있었기 때문이며, 신라 49대 헌강왕때 보조 스님이 중건 천연사라 불렀는데 절에 있는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동내 개구쟁이들이 이를 잡아 죽였더니, 그후부터 샘물이 솟아나지 않아 샘이 숨었다고 조선 19대 숙종때 천은사라 개명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후부터 천은사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큰 걱정이었는데, 물을 지켜주는 뱀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이광사가 수체로 지리산 천은사라 글씨를 써 일주문에 걸어 단 후로는 불이 나지 않았다 하며, 지금도 새벽 고요한 시간에 일주문에 귀를 기울이면 현판 글씨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절 입구의 수홍문은 무지개가 드리워 진 듯 계곡과 아름다운 운치를 띤다.

 

여수

임진란 때 수군의 기지였으며, 전라좌수영이 있어 이순신 장군이 절도사로 부임되어, 임진란 극복의 현장이자 그의 유적지가 산재한 곳이며, 해상국립공원의 시발점이자 전라선의 종착역인 여수시는 1949년 6월 여수항이 개항되고, 이해 8월 15일 시로 승격되었다. 인근 여천공단과 아울러 나날이 발전되는 도시이다. 도한 이곳 연안 부두에서는 거문도와 백도를 관광할 수 있는 배가 출항한다.

 

오동도

한려수도의 시발이자 종착지인 오동도는 약 3만 6천 여평의 작은 섬이나 720m의 방파제로 연결 육지화 되었으며, 섬전체가 동백나무로 붉은 꽃이 피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섬이 된다. 임진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이 섬에 수군 연 병장을 만들었으며 해장죽 일명 시누대가 섬 전체에 자생하여 죽도라고도 불렸다 하며, 화살을 만들어 왜적을 무찌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한다. 오동도에서 멀리 바라보면 이순신 장군이 큰공을 세우시고 돌아가신 남해도 노량 앞 바다가 보이며 우측으로 돌산도가 누워있어 해질 무렵 황금물결이 넘실대는 사이로 돛단배가 떠나는 경치에 방파제에 걸터앉아 해녀가 직접 따오는 해삼과 전복으로 안주 삼아 술한잔 하는 그 맛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동도 전설

옛날 오동도 숲 속에 봉황새 한 마리가 정답게 살았는데 봉황이 긷든 곳에 역적이 난다고 임금이 신하를 시켜 모든 숲을 다 베어버려, 보금자리를 잃은 봉황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다시는 오지 않았는데 세월이 흘러 봉황의 넋인 양 어디서 왔는지 한 어부가 아름다운 색시와 함께 이곳에 정착을 하여 오순도순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도적 떼가 나타나 어부의 색시를 겁탈하려 하자 색시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수 십길 절벽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죽어 버리니 고기잡이에서 돌아온 어부는 통곡을 하며 양지바른 곳에 묻었는데 이듬해부터 그곳에는 색시의 발간 순정인 듯 새빨간 동백꽃이 피어났으며 색시의 절개인 듯 시누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온 섬을 동백과 시누대로 덮었다는 슬픈 이야기랍니다.

 

진남관

보물 324호로 지정된 진남관은 우리 나라 최대의 목조 건물로서 건평 240평 특히 둘래가 2m가 넘는 나무기둥68개가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 경복궁 경회루와 충무 세병관과 아울러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는 진남관은 서기1599년 4대 통제사로 부임한 이 사연이 지은 거대한 객사인데, 1718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18년 이제연 좌수사가 재건, 오늘에 이르며 마루에는 거북선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돌산연육교

여수시 학동과 돌산도를 연결하는 다리로서, 공사비 180억을 들여 1980년 12월에 착공하여 1984년 12월 15일 만 4년만에 주공, 길이 450m, 폭 12.8m로서 여수항에 입항하는 대형선박을 위해 양쪽 해안 안에 높이 62m의 교각을 설치 직경 56∼87㎜의 강철 케이블 28개로 교판을 묶어 무게를 지탱하게 하는 특수 공법으로 시공되었고 이 다리 개통 전에는 5만의 돌산도 주민들이 배를 타고 여수시로 통행하는 불편을 겪었으나, 이제는 돌산도 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출하와 학생과 주민들의 통행을 편리하게 하였다.

 

여천 흥국사 (여천군 삼일면 승흥리)

서기 1195년 고려 명종 25년 보조국사가 창건 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고 있어 흥국사로 이름지었으며, 변방의 국찰로서 임진왜란 때는 기허대사가 이끄는 승병들이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공을 세웠으며, 왜적들의 방화로 소실되어, 서기 1624년 인조 임금때 계특대사가 재 창건하였고, 경내에는 보물 396호 대웅전과 보물 563호 흥교가 있으며 여수 여천 지방에서 제일 큰 사찰이다.

 

순천

예로부터 미인이 많아 순천에서 인물 자랑 말고 벌교에서 힘 자랑 말며 여수에서 돈 자랑 말라는 이야기도 있듯이, 미인 많고 걸인이 없다는 순천은 신라시대에는 승평군이였고, 서기 1309년 고려 충선왕 때 순천 부라 불리다 1949년 8월 15일 시로 승격 오늘에 이른다. 1948년 10월 19일 북괴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좌익 분자들의 소행으로 여·순반란 사건의 일어나 많은 피해를 입었던 도시이다.

 

팔마비와 팔마로

승주 군청 앞에는 팔마비가 있어 순천 사람들의 긍지와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고려 충렬왕때 최석이라는 사람이 이곳 부사로 있었다. 청렴 결백하여 선정을 베풀었는데, 임무를 끝내고 다른 곳으로 부임되어 갈 때 당시풍습대로 이 고을 백성들이 말 8필을 선물로 드렸는데, 최석부사는 임지에 도착 말 9필을 순천으로 되돌려 보냈다. 타고 가던 말 한 마리가 도중에 새끼를 낳았는데,  그것가지 돌려보낸 것이다. 감격한 고을 사람들은 그의 청렴결백을 고맙게 여기면서 선정비를 세워 성밖 연자교 옆에 세웠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정유재란 때 부서진 것을 서기 1617년 광해군 때 이수광 부사가 다시 세웠다.

 

조계산 선암사 (승주군 쌍암면 죽학리)

승주군 쌍암면 죽학리로 해발 887m의 조계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선암사는 , 서기 529년 백제 성왕 7년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비로암으로 불리다가 서기 742년 신라 35대 경덕왕때 도선국사가 중창 신선이 내린 바위라고 선암사로 개명, 1092년 고려 선종 9년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순조 24년 해붕대사가 중건 오늘에 이르며 사찰 입구에는 7선녀가 내려와 목욕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계곡에 강선루와 강선교가 세워져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고, 일대의 삼나무 편백 은행나무 영산홍 등의 꽃이 피거나 단풍이 들면 아름다운 절경에 넋을 잃는다.

경내에는 보물 395호인 3층석탑과 보물 400호인 승선교가 있다.

 

선암사 유래

선암사 후봉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높이가 약 50철이나 되며 배 바위라고 한다. 조선 19대 숙종때 호암 선사가 배 바위에 올라 관세음 보살을 보려고 100일 기도를 드렸는데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지성이 부족하고 믿음이 약한 것으로 만나지 못한 것이라 한탄하며, 죽기를 작정 배 바위에서 몸을 날려 떨어졌다. 이때 웬 여인이 코끼리를 타고 천상에 내려와 보자기로 선사를 받아 배바위에 올려놓으며, 나를 위해 죽는 것이 보리 심이라 하고는 사라졌다. 그때 호암선사는 관세음 보살임을 알고 법열을 가다듬어 선암사에 원통전을 짓고 관세음 보살을 봉안하니. 신선이 내린 곳이라 하여 선암사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또한 선암사 주위에 단풍 나무과에 속한 고로쇠나무가 있어, 매년 경칩 때면 고로쇠나무에서 약수가 나와 만병 통치라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약수를 즐긴다고 한다.

 

송광사 (승주군 송광면 신평리)

승주군 송광면 신평리 해발 887m의 도립공원 조계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송광사는 우리 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이며 3보사찰 즉, 불·법·승·불교의 3보중에 승에 해당하는 고찰이다. 신라말기 혜린선사가 창건, 길상사라 하고 산명을 송광산이라 하였는데 서기 1197년 고려 명종 27년 보조국사가 제자 수우에게 큰절을 짓도록 하여 80여 칸의 집을 세우고 조계종의 눙흥 도장으로 만든 후 희종 임금이 조계종 명을 다 조계산으로 개칭하였고, 16분의 국사가 배출되어 승보사찰의 지위로 굳혀 왔으며 임진란과 여·순 반란사건, 6·25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나, 지금도 큰 사찰답게 많은 국보, 보물을 갖고 있다. 국보 42호 목각 삼존 불감, 국보 43호 고려 조종 제서, 국보 56호 국사전 보물 176호인 금동요령 등 국보 3점, 보물 12점, 천연 기념물 1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추사 김정희의 글과 조선 명필 한석봉의 글 조선 영조임금의 어필 대원군의 난초 족자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고향수

보조 구사가 심고 내가 죽으면 이 나무도 죽을 것이요, 이 나무에 푸른 잎이 피어나면 나 또한 환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심었는데, 나무가 과연 보조국사님이 열반에 들자 시들시들 말라죽어 800년이 지난 지금도 썩어 넘어지지 않고, 초연히 서서 보조국사가 환생하기를 기다리는 이상한 나무다.

 

쌍향수

천연 기념물 88호인 이 나무는 조계산 천자암 뒤뜰에 두 그루의 향나무가 쌍둥이처럼 똑같이 서서 몸을 뒤틀고 꼬았으며 가지는 땅을 향해 뻗은 이상한 모양의 향나무인데, 보조국사가 금나라에 유학하여 공부할 때 장종왕비의 병을 고쳐주어 장종 왕비는 왕자 감당을 제자로 주어 데려가게 하여 두 사람이 조계산 천자암에 들려 짚고 왔던 지팡이를 꽂았더니 잎이 나고 살아서, 오늘날까지 800여년을 살아와 쌍향수가 되었다.

 

비사리구시

사천왕상 옆에 있는 보트모양의 나무통인데, 여학생들이 보고는 스님들의 설거지통이라 하고 아주머니들은 스님들의 목욕통이라고 하며 아저씨들은 배라고 하니만, 사실은 옛날에 송광사에 참배하러 오는 많은 신도들을 공양하기 위해 주먹밥을 만들러 담아놓는 일종의 밥통이라고 한다. 옛날 남원고을에 몇 아름드리 싸리나무가 있었는데, 벼락을 맞아 쓰러져 산에서 긁어내리려고 많은 사람들이 밧줄을 매어 당기니 꼼짝도 안해 사람들이 합창하여, 이 나무를 끌어다 나라님의 궁궐을 짓세 어-허 어-허 그래도 움직이지 않자 이번에는 명산 대찰의 각 절 이름을 다 대어도 움직이지 않자, 마지막으로 이 나무를 굴어다 순천 송광사 대들보를 세우자. 어-허 어-허 그랬더니 꼼짝도 안 하던 나무가 움직여 송광사로 끌고 가는데, 지금처럼 기중기도 없고 트럭도 없는 시절이라 많은 사람이 몇 달을 끌고 가야 남원에서 송광사로 옮겨지겠다고 걱정하였더니, 원님이 그럼 속을 좀 파내면 가벼워서 운반하기가 쉬울 것이라 하여 파낸 곳이 지금의 비사리구시가 된 것이다.

【전설】

옛날 승주땅 어느 고을에 70살 먹은 할머니가 점심 잘 자시고 갑자기 죽었는데 죽은 할머니는 저승사자를 따라가 염라대왕 앞에 다른 귀신들과 함께 재판 받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염라대왕이 말하기를 이중 누가 순천 송광사를 가본 사람이 있느냐 가본 사람이 있으면 살려주리라 하였더니 너도나도 가보았다고 앞에 나섰다. 염라대왕이 맨 앞에 섰는 사람에게 참말로 송광사에 가보았느냐 물으니, 예 하고 대담하였다. 그러면 길이가 얼마며 폭이 어느 만큼 되느냐 하고 물으니 안 가본 놈이 알 수가 없어, 엉터리 답을 하니 염라대왕이 크게 노하여 지옥으로 보내고 다음 또 다음,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할머니 차례가 되었는데, 염라대왕이 비사리 구시 길이, 높이, 너비를 물으니 할머니 답하기를 살아 생전 초파일날도 가보고 보조국사님 제삿날도 가보고 여러 번 가보았습니다. 하지만 구시를 보고도 재보지 않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더니 대왕은 정직한 사람이라 크게 칭찬하여 좀더 살다 오라 하여 눈을 뜨니 어머님 죽었다고 아들딸들이 울고불고 야단들이었다. 놀라 아들을 붙잡고 저승 갔던 이야기를 하며 자를 가지고 즉시 송광사에 가자고 졸라 송광사 에 들려 비사리 구시를 재어 어머님 길이가 17자입니다. 그리고 높이는 3자입니다. 너비는 4자입니다. 하고 가르쳐 드리고 돌아서서 일주문을 나서니 야야 아까 몇 자 몇 자라고 했느냐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아들은 명주실을 길이 높이 너비만큼 각각 끊어 어머님 빨간 주머니 에 넣어 드리며 어머님 후에 돌아가셔서 염라대왕이 물으면 주머니에서 실을 꺼내어 길이는 요만큼 높이는 요만큼 하고 답하셔요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이곳 순천지방에는 나이 많은 노인들이 송광사 비사리 구시를 자로 재어 실을 끊어 빨간 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 되어, 송광사에 노인들이 많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다.

 

담양

신라 때는 추성군, 고려대는 담주라 불렀으며, 1395년 담양군이 되었으며 온후한 기후와 기름진 토질이 대나무가 자라기 알맞아 집집마다 집뒤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여 예로부터 죽세 가공품이 유명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죽물박물관이 1981년 3월 개관되어 전통 고죽품과 담양에서 생산되는 죽세품 외국 생산 죽세품 등 총 878점이 전시되어 있다.

 

담양호

1976년 10월에 완공된 이 댐은 영산강 유역 종합개발 1단계사업으로 완성된 4개호 중의 하나인 이곳은 , 영산강 본류인 금용천을 박아 제방길이 316m 높이 45m 저수량 6,780만 톤으로 담양 금성면과 용면 일대 평야가 수리 안전답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호변의 경관이 좋아 관광객들의 휴식처로 각광을 받는 곳입니다.

 

장성댐

영산강유역개발 1단계사업으로, 공사비 68억을 들여 1972년 착공하여 1976년 완공된 인공 호수로서 장성읍 용강리 황용강 상류를 막아 제방길이 603m 높이 36m 저수량 8,970만 톤 둘레 24㎞로서 영산강유역 수리 안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인근에 내장산 백양사 등이 있어 종합관광지로 발돋움하며 대어가 많이 잡이는 1급 낚시터로 알려져 있다.

 

백양사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춘 백양 추 내장 이라지만 단풍은 양의 내장산이요 질의 백양사라.

서기 633년 백제 30대 무왕 33년에 여환 선사가 창건 백암사라 하였다가 서기 1034년 고려 19대 덕종 3년 중연선사가 중건하고 정토사라 고쳤으며, 조선 숙종 때 환성 선사가 이곳에서 법회를 할 때 그 설법이 너무 유명해서 뒷산에 있던 백양이 내려왔다고 백양사로 고쳤다 하며, 절 뒤편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630m 높이의 학바위이며, 천연기념물 153호인 비자나무 숲이 있고 단풍이 들면 천하일경을 이루는 곳이다. (197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영광 불갑사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불갑산 해발 517m의 북쪽 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도의 마라 난타가 백제에 들어와 가장 먼저 불교를 전한 대표사찰이라 하여 불갑사라 부른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다른 기록에는 서기 475년 백제 22대 문주왕 때 행운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고려대 고승 진각 국사가 번창시켜 유명해졌으며, 1359년 고려 공민왕때 이달충씨가 세운 진각 국사비가 있고 인도승 마라난타가 창건했다는 대웅전 종마루 귀면 위에 세운 작은 석탑과 보리수내에는 진각국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천연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된, 참식 나무가 있고 인근에 임진왜란때 포로로 끌려가 포로 체험기 간양록을 지은 수은 가항 선생이 벼슬을 사양하고 많은 제자를 길러 후에 그의 제자들이 세운 내산 서원이 있다.

 

영광굴비

제주도 남서쪽에서 겨울을 난 조기 떼는 2월이 되면 천천히 북쪽으로 이동, 3월쯤에 영광 앞바다를 통과할 때면 암 조기들이 알을 슬어 제일 좋은 조기가 잡히며, 5월달에 연평도를 거쳐 함경북도 대화도에 이른 다음 여름을 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다. 고려 인종때,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임금이 되려고 하였으나 그의 부하 척준경의 배반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이곳 영광 법성포로 귀양와서 영광굴비의 감칠맛을 인종임금께 맛보이려고 석어라는 이름을 붙여 임금에게 오렸다고 전해진다. 영광 굴비를 으뜸으로 치는 것은 이곳의 조기가 알을 통통히 밴 오사리때 잡아 섭장간의 방법 즉 소금물에 씻어 사흘을 절이고 다섯 마리씩 엮어 2주 동안 햇볕에 말려 통보리 속에 묻어 저장하여 맛이 있다고 하며, 지금은 어업의 발달로 영광 칠산 앞 바다에 조기 떼가 오기전 미리 앞질러 신안군 소흑산도 부근에서 잡아버리기 때문에, 예전같이 오사라리 굴비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시중에 나와있는 영광 굴비라는 상표는 거의가 가짜일 수 있다.

 

목포

호남선의 종착지이며, 다도해의 입구로 유달산이 북풍을 막고, 고하도와 화원 반도가 풍랑을 막아 천연적인 방파제로 좋은 항구이다.

신라 때는 면주, 고려 때는 무안 서기1897년 개항과 동시 목포가 되어 1913년 호남선의 개통으로 많은 발전을 보아 1949년 8월 15일 시로 승격되었다.

 

유달산

노량산맥의 서북 지맥인 남쪽 끝이며 목포해와 다도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해발 228m의 이산은 기암절벽이 첩첩하여 호남의 명산으로 알려졌다. 산정에는 두 개의 봉수대가 있어, 예로부터 외적을 경계하였고 임진란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을 쌓은 것처럼 가장하여 적을 속였다는 노적봉과 달성각 대학루 등 5개의 정자가 있으며, 가요 팬의 심금을 울렸던 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씨의 노래 비가 세워져 있다.

 

조각공원

이등 바위 밑에 위치한 국내 최초의 조각 공원은 1092년 개장되었고, 1만 2만 평의 대지에 이곳 출신 조각가와 전국 유명 조각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삼학도

유달산과 함께 목포의 상징인 삼학도는 부두앞 300m 위치에 3개의 섬이였는데 제방을 만들고 매립하여 육지가 되었다.

【전설】

옛날 유달산 바위에서 수도하던 한 젊은 선비가 있었는데, 산아래 마을에 세처녀가 똑같이 연모의 정을 품었다. 세 처녀는 선비를 찾아가 사랑을 호소하였다. 선비는 애달픈 사랑의 호소를 뿌리친 채 수도에만 전념하였지만, 아름다운 처녀들의 자태가 눈에 아롱거려 도무지 공부가 되지 않아 세 처녀에게 수도에 방해가 되니 수도가 끝날 때까지 저 멀리 섬에 가서 기다릴 것을 애원하였다. 세 처녀는 선비의 뜻을 따라 배를 타고 멀리 떠나기로 작정, 이별의 뱃전에 올랐다. 배가 해변을 떠날 때 유달산에서 지켜보던 선비는, 저 처녀들이 있는 한 마음이 흔들려 수도를 할 수 없으므로, 활을 당겨 배를 향해 쏘니 화살은 세 처녀를 태운 뱃전에 맞아 바다에 가라앉아 버리고 배가 가라앉은 바다에서 갑자기 세 마리 학이 하늘로 솟아올라 구슬픈 울음을 남기고 바다에 떨어져 죽으니 섬이 되었다. 그후 사람들은 학이 앉은 섬이라 삼학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산강하구언

영산강 개발 핵심 공사로서 1976년 착공하여 1981년 완공되었고, 총 공사비 1,452억 원을 들여 길이 4,350m 높이 20m 배수갑문 8개로서 초당 5,600톤씩 물을 바다로 보낼 수 있다. 이 공사의 완공으로 멀리 돌아가거나 배로 건너다녔던 무안군과 영암군을 하나로 연결시켰으며, 홍수 때 바닷물이 역류하여 농작물이 염분 피해를 입었던 것을 방지하였고, 식수와 농업 및 공업 용수를 확보하였고 쓸모 없는 갈대밭과 불모지를 개간 연간 쌀 56,000톤의 증산과 영산강 전역에 가뭄과 홍수를 몰아냈다.

 

월출산

호남 5대 명산의 하나이며 기암 괴석들이 창검을 늘어 세운 듯 장관을 이루어 금강산을 연상하게 하는 이 산은 신라 때는 월라산 고려대는 월생산이라 하였고, 조선시대에 월출산이라 불렸다하니 달과는 떨어질 수 없는 산이다. 해발 808m로서 최고봉은 천왕봉이며, 정상에 서면 남해안 일대가 한눈에 보이며 계절 따라 동백꽃, 진달래, 철쭉꽃이 아름답게 피고 도갑사, 천왕사, 무위사 등의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다..

1973년 3월 14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도갑사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신라 말기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고, 서기 1456년 조선 7대 세조때 신미와 수미스님이 중건하였다. 경내에는 국보 50호 해탈문과 보물 89호인 석조 여래 좌상이 보존되어 있다.

【전설】

어느 겨울날 이곳 구림지 성기천에 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는 데, 때가 겨울인데 참외가 한 개 떠 내려와 빨래 방망이로 밀어내면 또 다가들고 하여 먹어 버렸다.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태기가 있어 배가 자꾸 불어오는 것이었다. 달이 탄 처녀는 옥동자를 낳았는데, 처녀가 아기를 낳아 남의 이목이 두려워 7일째 되는 날 성기천 뒷산 대밭에 버렸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모정을 참지 못해 그 자리에 가보니 죽은 줄 알았던 아기는 비둘기가 털을 뽑아 감싸주고 학이 품고 먹이를 주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에 하늘이 내린 귀한 자식인줄 믿고 문사사 주지에게 맡겨 길렀다. 그로 인해 마을을 구림이라 하였고, 바위를 국사암이라 하였다 그후 장성하여 도선 스님이 되어 도를 많이 닦았는데, 마침 당나라 왕이 선왕의 능소를 찾기 위해 도선 스님을 초청하여 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꿈에 당나라 선왕이 백마를 타고 가다가 우뚝 멈추는 것이다. 도선은 당나라에 들어가 꿈에 본 자리를 찾아 터를 삼으니, 만족한 왕은 옥련자라는 벼슬을 내리고 국사의 칭호를 주었다. 도선은 문수사에 돌아와 도갑사를 창건하고, 떠나면서 내가 떠난 후 철모쓴 사람이 와서 절에 불을 지를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전설대로 임진란과 6·25때 철모쓴 군인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무위사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신라 26대 진평왕대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하였다. 서기 875년 도선 국사의 중창으로 갈옥사라 불리다가 서기 949년 고려 정종때 선각 국사가 3창하여 모옥사로 고쳤다. 서기 1550년 조선 13대 명종 임금때 태강선사가 4창하여 무위사라 개칭하였다. 경내에는 국보 13호인 극락보전과 보물 607호인 선각대사 편광 탑비가 보전되어 있다.

【전설】

무위사가 완성된 후 사찰의 번영을 위해 백일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날 의복이 남루하고 얼굴이 찌그러진 한 거사가 절 문을 들어서는데, 주지 스님이 그를 보니 행색은 추하나 얼굴에는 청아한 빛이 돌고 행동이 깊은 수도의 경지에 이른 고승임이 풍겨 법당에 모시니, 들어가자 곧 법당 문을 모두 잠그고 앞으로 49일간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하였다. 49일째 하도 궁금하게 여긴 주지 스님이 법당 문에 구멍을 뚫고 안을 들여다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마침 새는 그림을 모두 마치고 관음보살의 눈에 눈동자를 그리려던 찰나, 인기척을 느낀 새는 붓을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런 전설 후 관음보살 중에는 정말로 눈동자가 없으며 가운데 본존불의 눈은 얼마나 잘 그렸는지 보는 사람의 눈길을 따라 다닌다고 하며 일설에는 이 탱화를 중국의 오도자가 그렸다고 한다.

 

대흥사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소백산 최 말단에 솟은 해발 703m의 두륜산에 자리잡은 대흥사는 서기 426년 신라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하고, 서기 508년 백제 25대 무령왕때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선행비구가 창건했다고 하며, 또한 서기 514년 신라 23대 법흥왕때 아도 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창건후 대둔사라 하였는데, 이 절에서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를 배출하여 크게 일으켰다 하여 대흥사라 개창하였다 한다. 임진란 때에는 서산대사가 승군 총본영으로 국방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대사가 묘향산 보현사에서 입적할 때 유언으로, 만년이 지나도록 병란이 범하지 않고 삼재를 면할 두륜산 대흥사에 나의 가사와 선조 임금이 내린 교지 도한 유물들을 보관하라 하였으니, 그의 제자 청련대사가 그의 유언을 받들어 서기 1611년 대흥사에 영당을 세우고, 서산대사의 유물을 보존하니 임진란과 6·25를 겪으면서도 재앙을 모면 피해를 입니 않았으며, 천불전에는 경주에서 옥돌로 열 사람이 6년 걸려 천불상을 조성하여, 3척의 배로 울산 부산을 거쳐 해남으로 운반도중 풍랑을 만나 표류, 일본으로 도착하였으나  부처님의 불력으로 다시 대흥사로 모셔와 봉안하였으며, 경내에는 보물 48호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보물 88호 탑산사 동종, 보물 320호 응진전3층 사리탑 등과 서산대사의 유품 등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으며, 천연기념물 173호인 왕벗나무 자생지와 봄 춘백 여름 녹음 가을 단풍 겨울 동백의 사철 아름다운 경승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진도 연육교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 울돌몰 해협을 연결하는 진도대교는 1980년 12월 착공하여 1984년 10월 18일 준공, 총공사비 118억이 들어 길이 484m, 폭 11.7m의 다리로서 사나운 물길로 물 속에 교각을 세우지 못해 양쪽 해안에 높이 69m의 강철 철탑을 세우고 강철케이블로 교면을 묶어 연결시킨 사장교란 것이 특징이며,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해협의 빠른 물길과 지형을 이용 대승전을 거둔 명랑해전의 전승지와 다도해권 어업 및 관광개발에 이 다리는 큰 몫을 하였으며 8만여 진도 군민들이 육지와의 통행이 편리하게 되었다.

 

진도

임진란 울돌목의 명랑해전과 고려 때 배중손 장군이 이끄는 대몽항쟁 삼별초군의 유적지 및 천연기념물 53호인 용맹하고 영리한 진돗개의 본고장인 진도군은 261개의 섬으로 이루어졌고, 신라 때부터 진도현으로 불려졌으며 서기 995년 고려 성종때 옥주라 개칭되었다가 고려 현종때 진도로 환원 오늘에 이르며 1984년 10월 18일 대교 개통으로 관광지가 많은 이곳의 많은 발전이 기대되는 곳입니다.

 

진돗개

진돗개는 네 다리가 늠름하고 털에 윤기가 나며, 체격이 꽉 짜이고 색깔은 흰색이나 노란 색이며, 머리는 팔각형 등은 곧으며 세모꼴의 작은 귀 꼬리는 굵고 위쪽으로 힘차게 말려있다. 1938년 일본인 동물학자 모리씨가 국제 동물 학계에 한국에만 있는 우수한 품종의 개로 보고함으로, 1962년 12월 3일에 천연 기념물로 지정 보호를 받으며 1968년 진돗개 보육 협동조합을 만들어 매년 4월과 9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우수 견을 족보에 올리며, 현재 진도에 있는 순종은 약 1,600여 마리라고 한다.

 

진도 회동마을 영등살

매년 음력 2월과 3월 그믐이면, 회동 마을과 약 2㎞ 떨어진 모도섬과의 바닷물이 갈라져 많은 사람들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기적이라며 모여들어, 회동에서 모도섬으로 걸어가며 해초도 뜯고 조개도 주우며 신기한 자연의 힘에 감탄을 한다. 이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평상시 7m의 수심이, 지형적인 요인과 일년중 바다 물이 가장 많이 빠져 일어나, 과학적으로는 달의 인력으로 일어나는 조수간만의 차로 길이 생기는데, 이곳 주민들은 바다길이 열리도록 기도한 뽕할머니의 영혼이 등천하였다는 전설에 따라 영등살이라 부르며, 풍년과 풍어를 빌며 영등제를 매년 지내는데 제사에 참여하면 아기 못 낳는 사람과 사랑을 못 이룬 사람 그리고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길이 2㎞ 폭 약30m가 한시간 정도 갈라졌다가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전설】

조선 초기에 손 동지라 한사람이 귀향을 가다 심한 풍랑으로 표류하여 지금의 회동마을에 도착하여 살게 되었는데, 200년동안 이 마을에 살게 된 손동지 후손들이 호랑이의 해를 입어 호동이라 불렀다. 너무 심한 호환으로 도저히 살수가 없어 뗏목을 만들어 마을앞 모도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서두르다가 그만 뽕할머니를 마을에 남겨둔 채로 떠났다. 호동에 혼자 남은 할머니는 무섭고 가족이 그리워 용왕님께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열심히 빌었더니 꿈에 용왕이 나타나 내일 바다에 길을 내줄 테니 섬으로 건너가라고 일렀다. 다음날도 용왕님께 빌었더니, 바다 물이 갈라지면서 모도섬과 연결되었다. 이것을 본 모도섬의 가족들과 주님들이 뽕할머니를 찾기 위해 징과 꽹과리를 치며 바다 길을 건너오니, 먹지 못해 기진 맥진한 할머니는 기도로 너희들과 만나니 한이 없다며 숨을 거두었다. 이를 본 주민들은 뽕할머니의 기도가 바닷물을 열고 등천하였다고, 영등살이라 부르며 매년 음력 2월 그믐이면 제사를 지내며 징과 꽹과리, 장구를 치며 열린 바닷길을 건너갔다 온다고 한다.

 

우리 나라 땅끝 (토말)

우리 나라 행정구역상 끝은 제주도 마라도이지만, 육지의 끝은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 부락으로 해발 122m의 사자봉에 오르면 약 100여년전 어느 지사에 의해 자연석에 새겨진 토말이라는 각자석이 있고 1981년 3월 3일 박남준 선생이 글을 쓰고, 오경석 해남 군수가 건립한 땅끝 토말이란 비가 서 있으니 그 비문을 적어본다.

전면 : 토말

후면 : 태초에 당이 생성되었고, 인류가 발생하였으며 한 겨레를 이루어 국토를 그은 다음, 국가를 세웠으니 맨 위가 백두산이며 맨 아래가 이 사자 봉이니라 우리의 조상들이 이름하여 땅끝 또는 토말이라 하였고, 극남 북위 34도 17분 38초이며 대한민국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이다. 장한지고 거룩한지고 우리 삼천리 가토 겨레여, 여기에서 저 대자연을 굽어보며 조국의 무궁을 기원하자.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날씨가 좋은 날에는 제주도 한라산이 아련히 보이며 다도해의 많은 섬들을 볼 수 있으며, 인근에 송호리 해수욕장과 신라 35대 경덕왕 때 의조화상이 창건하였다는 달마산 미황사가 있다.

 

완도 연육교

해남군 남창면과 달도사이 138m, 달도와 완도 원동과의 129.9m의 연륙교가 1969년 2월에 준공되어 완도의 풍부한 해산물의 수송과 완도주민 그리고 다도해 관광객들의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완도

김의 명산지이며 해산물이 풍부한 완도는 크고 작은 202개의 섬으로 이루어 졌으며 서기 828년 신라 흥덕왕대 이곳 출신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때 , 당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 서 남해에 습격해와,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사람을 납치해가 노예로 부리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국하여, 왕에게 보고하고 이를 막기 위해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건의 허락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완도로 돌아와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의 도둑들을 물리치고 동방무역의 패권을 잡았으며, 이로 인해 무역항과 해로의 요충지가 되었으며,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항구로서 한일 카페리호가 3시간이면 제두도에 도착한다.

 

완도 김 양식

우리 나라 최초의 김 생산지는 전남 광양군 태인도이며, 완도는 1870년경에 완도군 약산면 정가섬 앞에서 정시원이라는 사람이 개펄에 박고 대발을 달아놓는 방법인 염흥식이 차차 개발되어 바닷물이 들고남에 따라 자유롭게 물위에 뜨도록 만들었는데, 이 방식을 부흥식 또는 뜬발식이라 하였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 대발 대신 나이롱실로 만든 그물을 쳐서 하얀 스치로폴 부표를 달아 물위에 띄워놓는 망흥식으로 바뀌었다. 김 양식은 9월 하순에 설치하여, 11월달부터 다음해 4, 5월까지 채취하여 잡초, 파래, 모래 등을 가려내고 민물에 씻어 길이 20.6㎝ 폭 18.9㎝의 나무 되로 떠서 김발 위에 부어, 바람이 적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말려야 맛이 좋다고 한다.

 

 

거문도                                                                                            관광지 미리보기 ☞클릭!

 

전남 여천군 삼산면에 속해 있으며 여수에서 약 48해리 떨어져있고 여천군 관할 47개 유인도와 233개의 무인도중 거문도는 동도, 소도, 고도와 백도 군으로 형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면소재지가 있는 고도를 거문도라 부르는데 천연적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방파제 구실을 하고 수심이 깊어 원양어업의 전진기지이기도하며 서기 1885년 고종때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 아시아 함대사령관 오웰제독이 맥쿠리에게 군함 6척과 수송선 2척으로 거문도를 점령하게 한 거문도 사건을 일으켰을 때 청나라의 제독 정여창이 이곳에 와 주민들과 대화를 할 때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을 하였는데 당시 거문도에는 귀양살이 온 사람들의 후손들이 많이 살아 우수한 필력으로 답변하니 놀란 정여창이 대문장가들이 많다는 뜻으로 거문도라 물렀다하며 영국군이 점령당시 해밀턴 중장이 다녀갔다고 서양에서는 해밀턴 항으로 표기한다고 하고 당시 희생된 7명의 영국군 묘지가 있으며 해발 196m의 수월산 기슭에는 1904년에 만든 동양 최대의 거문도 등대가 백리 밤 뱃길을 비춰주고 해안의 절벽 경치와 3㎞의 동백 꽃 터널은 관광객을 즐겁게 한다

 

백도 (태고의 신비 섬)

1979년 12월 명승지 7호로 지정되었으며, 거문도에서 약 16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있고, 백개의 섬중에 한 개가 모자라는 99개의 섬이라고 일백백자에서 일자를 뺀 흰 백자 백도라 부르는, 이 섬은 상백도와 하백도로 나누고 있으며 풍란 석란 후박나무 등의 아열대 희귀목이 많이 자생하고 있고 병풍바위 나루섬, 형제바위 매바위, 탕근여 등의 괴암 괴석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 태고적 신비와 남해의 마지막 비경을 만끽할 수 있으며, 상백도의 태양역 무인등대 등을 관광할 수 있다. 홍도 목포에서 115㎞, 흑산도에서 22㎞ 떨어진 절해 고도인 이 섬은 1965년 천연기념물 170호로 지정되었으며, 섬전체가 기암괴석으로 거북바위, 석화굴, 독립문 바위, 부부탑 바위, 슬픈여, 두루미섬, 돛대바위, 병풍바위 등으로 이루어졌고 수많은 절벽, 동굴과 함께 대엽풍란, 후박나무 동백 등 270여종의 희귀한 식물과 170여종의 동물이 서식하며 섬전체가 홍갈색의 규암으로 이루어져 붉은 빛을 띤다고 해서 홍도라 부른다. 쪽빛 물결이 출렁이며 기암괴석으로 온통 둘러싸여 있는 섬 백도(白島), 멀리서 바라보면서 섬 자체가 마치 하얀 뭉게구름처럼 보여 흡사 무릉도원으로 가고 있는 곳으로 착각케 한다. 거문도에서 1시간 남짓 배를 타고 가다보면 백도의 절경이 서서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그 모습을 드러낸다.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절벽, 갖가지 전설이 가득한 무인도, 태고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희귀동물과 식물들이 쪽빛 바다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보는 사람이 절로 타성을 낼 정도다.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에 위치한 백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역으로 지난 79년 국가명승지 제7호로 지정됐다. 여수여객선터미널과는 115㎞떨어져 있으며 엄밀하게는 상백도와 하백도로 나뉜다. 백도는 39개의 크고 작은 무인도가 군데군데 병풍처럼 수놓여 있어 남해의 해금강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또 천연기념물 215호인 흑비둘기와 팔색조, 휘파람새 등 30여종의 희귀조류와 원추리꽃, 눈향나무, 소엽풍란 등 350여종의 아열대식물이 섬 전체에 가득차 있어 백도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신비의 섬' 그 자체이다.

 

또 옥황상제의 아들이 용왕의 딸과 사랑에 빠지자 이를 괘씸히 여긴 옥황상제가 그의 아들을 바다에 귀향을 보낸 다음 아들이 그리워 그를 다시 찾기 위해 1백명의 신하를 보냈지만 신하마저 돌아오지 않아 벌로 모두를 크고 작은 섬으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이밖에 멀리서 바라다보면 환상처럼 하앟게 섬이 보여 백도라 부른다고 한다. 주변 관광지로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의 상흔이 남아있는 섬 거문도가 있고 섬과 섬을 연결하는 삼호교, 거문도에서 우월산 등대까지 동백꽃으로 우거진 수월산 산책로 등이 있어 남해바다에는 꼭 한번 가 볼만한 곳이다. 특히 기암괴석 사이로 떠오르는 아침 일출광경은 보는 사람들을 황홀경에 빠지게 할 정도로 장관이다.

 

교통편 :

백도를 가려면 우선 여수에서 거문도까지 가야한다. 여수여객선터미널에서 거문도로 들어가는 배는 데모크라시 3호와 순풍호가 있다. 

쾌속선인 데모크라시 3호는 성수기인 7∼8월에는 하루 3회운항한다. 여수에서 오전 7시와 오전11시20분, 오후3시40분에 각각 출발하며 운항시간은 1시간40분 정도 소요된다. 거문도에서 나오는 배는 오전9시, 오후1시20분, 오후3시30분에 있다. 요금은 우등 2만9천원, 일반 2만4천3백50원이다. 문의 : (0662)63-2191

순풍호는 1일 1회 왕복운항하며 여수에서 오후4시에 출발하고 거문도에서는 오전7시에 떠난다. 소요시간은 2시간40분이 걸리며 요금은 2만3천2백50원이다. 문의 : (0662)63-0117 거문도∼백도는 유람선이 수시로 다닌다. 왕복 유람시간은 2시간40분으로 요금은 1만3천원.

 

 

흑산도                                                                                            관광지 미리보기 ☞클릭!

 

일명 서초도라 부르며 목포에서 약 100㎞ 떨어진 이 섬은 대흑산도를 비롯 영산도, 다물도, 승도, 삼태도, 소흑산도 등으로 이로워졌으며, 섬전체가 산악지대이며, 절벽으로 배 댈곳은 진리와 예리뿐이다.

서해어장의 전지 전진기지로 파시 때면 수천 척의 어선들이 몰려 흥청대며, 신라 때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당나라와 교역할 때, 이곳을 거쳐갔다고 하며 예리항에는 기차를 보지 못하는 섬 어린애에게, 대통령이 보낸 기차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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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