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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추풍령

바람도 자고 가고 구름도 쉬어간다는 추풍령은, 해발 230.5m이며 동쪽에는 금산, 서쪽에는 선계산, 북쪽에는 학무산이 솟아있어 언제나 가을 바람이 불어오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 가을 추자 바람풍자를 써서 추풍령이라 불리고 경부고속도로 426㎞의 중간지점인 214㎞ 지점이며 휴게소에 높이 솟아 있는 탑은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이며 높이 30m이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을 격퇴시킨 자리이며 영남의 옛 선비들이 과거 보러갈 때는 가을 바람 솔솔 불어 낙엽 떨어지듯, 이 고개를 넘으면 과거에 떨어진다고 멀리 돌아 문경새재로 갔다고 한다.

 

김천

김천시는 1949년 실 승격되었으며 대구, 강경과 더불어 남한 5대 시장의 하나이다. 경남·북, 충북, 전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며 또한 김천 농악은 이 지방에서 옛날부터 전승되어 온 특이한 농악으로, 여러 가지 쇠가락을 다채롭게 치면서 진풀이를 벌이는데 진풀이는 전쟁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며, 마치 전쟁 놀음을 하는 것처럼 박진감이 넘치는 가락이 특색이라 하겠다.

 

직지사 (금릉군 대항면 운수동)

황악산 해발 1,111m 기슭에 위치한 직지사는 신라 19대(서기 418년)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자를 쓰지 않고 손으로 측량하여 절을 지었다고 직지사라 불렀다고도 하며,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세운 후 멀리 황악산을 가리키며 큰절이 설자리라 하여 직지사라 불린다고 한다. 법당에는 경주 옥돌로 만든 아기 천불상이 유명하여 예로부터 아들 못 낳는 여인들이 법당 앞에 들어서면서 남자 아기 불상을 제일 먼 저 보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있고 사명대사가 처음 입산하여 수도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사명스님은 18세에 선과에 급제하고, 30세에 직지사로 돌아와 주지직을 맡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 승병장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고 일본에 수신사로 갓 납치된 동포 3,000명과 많은 문화재를 되찾아 왔다.

 

구미시

1978년 구미읍이 시로 승격되었으며 낙동강의 공업용수와 교통의 편리한 입지조건으로 1971년 전자공업 및 섬유공업단지로 선정되어 약 230여개 업체 5만여 종업원이 수출 한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상모동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가 있다.

 

금오산

해발 976m의 금오산은 1970년 도립공원 1호로 지정되었고 신라 눌지왕때 아도화상이 김천 적지사를 창건하고 내려오다 보니 저녁 노을에 까마귀가 황금색이어서  따라가니 지금의 금오산으로 날아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쇠금자와 까마귀 오자를 써서 금오산이라 칭하였고, '오백년 도읍지를 팔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를 시조로 지어 고려 왕조의 안타까움을 노래했던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채미정이 있으며, 사명대사가 수도했다는 도선굴과 떨어지는 폭포 물을 맞으면 신경통이 낫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금폭포 등이 있다.

 

왜관

낙동강을 끼고 땅이 기름져, 농산물이 잘 되며 경산·영천과 더불어 사과의 고장입니다. 6·25때는 격전지로서, 99대의 폭격기가 동시에 폭격을 가한 전란으로 얼룩진 곳이며 임진란 때 낙동강을 따라 올라온 왜군들이 이곳에 병참기지로 삼았기 때문에 왜관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대구

대구는 서울, 부산, 다음가는 우리 나라 3대 도시이며 삼국 시대는 달구벌이라 불렸고, 선조 임금 때 경상감영이 설치되었으며 1949년 시로 승격되고 1981년 7월1일 직할시로 승격, 85년 현재 인구 약 200만이 살고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분지라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우며 섬유도시이고, 사과의 명산지이다. 대구에 사과나무를 처음 심은 사람은 동산병원 원장 풀레쳐 박사였고 경북·대구 지방에서 사과를, 영리적으로 첫 재배는 1902년경이며 토질과 기후가 알맞아 맛이 있고,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대신동의 서문시장과 약전 골목의 약령시가 유명하며 대구 사람들의 기질은 강직 순후하며 팔도 인심에 태산 준령이라 하였고 그래서  그런지 전국에서 막걸리를 제일 많이 마신다고 한다. 서울사람의 5배 부산사람의 3배정도.

 

달성공원

삼한 시대에 부족국가였던 달구벌 시대에 쌓아진 토성으로 높이 4m 길이 1,300m, 폭6.6m 달성 서씨의 문중 땅이었다. 성리학의 대가 서침이 달성에 은거하였는데, 조선 세종 때 왜적에 대한 방위 때문에 성을 쌓으려고 서씨에게 지금의 남산동 땅과 교환할 것을 의논하였을 때 서씨는 당을 사양하고 그 대신 대구 읍민이 나라에 빌려 쓴 곡식의 이자를 한 섬에 5되씩 감해줄 것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 달성을 나라에 희사하고 대구 읍민 모두가 고루 혜택을 입게 되었다. 1906년에는 일본인들이 신사를 달성안에 건립하여 참배를 강요하였는데 1966년 8월 철거하였으며 달성 공원은 1963년 10월 18일 사적 62호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공원 조성을 시작 3만 8천 7백 75평의 부지에 동물원, 종합 문화 회관 등을 건립 1969년 2월 15일 준공되어 오늘에 이른다.

 

두류공원

두류공원은 1965년 2월 도시 공원으로 지정하여 해발 135m의 두류산 및 성당 못을 개발 수여영장·도서관 종합경기장을 건립하여 시민 휴식공간으로 이용하는데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수영장에는 국제 규격의 시설을 하였으며 도심 한 복판에 있는 거목 47그루를 옮겨 심었다고 한다. 성당 못에는 거북섬·학섬·분수섬·부용정등을 시설하였으며 특히 학섬에는 깊은 산중에 자생하는 산삼·더덕·천궁 등 99가지의 풀을 심어 자생지를 방불케 하며 분수섬의 5색 불빛이 비치며, 30m의 물줄기가 솟으면 감탄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86년 준공 예정인 88대 타워가 이곳에 완공되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올 것이다.

 

약령시

1650년 개시한 약령시는 조선시대부터 전국 제일의 시장이었으나, 서양의학에 밀려 지금은 쇠퇴하여 30∼40개의 한의원. 다수의 한약방이 존속하여 약전 골목으로 칭하며 옛 잔영을 간직하고 있다.

 

앞산공원

500만평의 방대한 천연공원으로 대덕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특수 삭도630m와 케이블카 795m가 있어, 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대구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며 각종 유기 시설과 낙동강 전승 기념관이 있어 6·25때 사용되던 무기 및 간첩이 사용하는 물품, 탱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냉천 자연 공원

달성군 가창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팔조령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너무 차가워 찰냉자 내천자를 써서 냉천이라 부르는 유원지 앞 굴곡산 기슭에 1968년 1월 착공하여 1978년 8월 1일 개장했다. 자연 그대로의 수목에 3만평의 동물원 등이 있으며 특히 말하는 새인 구관조가 아가씨 사랑해요, 안녕하세요, 박상사이소 등의 말을 하면 사람들은 신기해 자리를 뜰 줄 모른다.

 

어린이 회관

대구시 황금동에 위치한 회관은 부지 44,073평에 회관 건물 2,657평을 총공사비 84억 3천 6백만 원을 들여 1983년 11월 15일 개관하였으며 회관 내에는 자연 전시실 및 과학실, 말하는 로봇트 등을 갖추었으며 높이 12m 폭 45m의 네갈래 인공폭포, 1952년 도입하여 1976년까지 24년간 경부선을 운행한 증기 기관차, F86 전투기 등이 전시되어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꿈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망우공원

대구의 젖줄 금호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임진 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조국을 지킨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동상, 조선 영조 12년 축성한 대구 읍성 남문이 1906년 고종 43년에 철거되었던 것을 1981년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원불교 동명 훈련원

팔공산 가는 길 오른쪽 봉무동에 위치하며, 여동명 선생께서 평소 불교에 정진하여 대구 약전 골목에서 대남 한의원을 경영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는데 1964년 인도의 베나레스에서 열린 세계 불교 지도자 대회에 참석하신 것을 계기로 불교의 중흥과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코자 동남아 7개국 일본, 태국, 홍콩, 인도, 중국, 대만, 한국의 성지를 본다 특색 있는 모형으로 룸비니 동산을 만들며 전 재산을 출현 건립하고 그 분의 법명을 따라 동명정사라 칭하여, 불교계와 공동 관리 해오다 여동명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고인의 장남 부부가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였으나, 원불교 대산 종법사의 법문에 크게 감명을 받은 후 입교하여 법명, 원광과 원가행을 각각 받으니 마음에 안정을 가져 동명정사를 원불교에 기증, 1981년 원불교 동명정사로 정식인가를 받았으며 1968년 착공, 1970년 준공되었다 한다.

 

팔공산

해발 1,192m이며 태백산맥의 지맥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깊어 동화사, 파계사, 은해사 등의 많은 사찰이 있고, 신라 55대 경애왕을 포석정에서 죽이고 개선하던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까지 쫓아와 전투를 벌였으나 오히려 패해 아끼던 장수 신승겸 등 많은 군사를 잃었으며 6·25때는 지리적인 이점을 방패삼아 괴뢰군 최후 공격을 봉쇄, 낙동강 전투와 아울러 최대의 격전지인 다부동 전투, 영천 전투는 전쟁 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곤도라 리프트가 개통되어 정상 부근까지 타고 오르게 되었고, 국내 최장의 리프트는 길이 1,200m 국내 최고속 초당 5.5m 시간당 800명을 수송할 수 있으며 주행 시간은 4분 소요된다.

 

동화사 (대구시 공산 2동)

31본산의 하나이며 신라 21대 소지왕때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라 불렸고. 신라 42대 흥덕왕 7년(882년)에 심지화상이 중창하였는데 겨울인데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가 꽃을 피워 동화사라 고쳤고, 공산을 팔공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심지 화상은 헌덕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팔공산에서 수도 중 속리산 길상사에서 진표율사가 점찰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때가 늦어 법당에 올라 참열할수 없어 당에 엎드려 참열 했다. 법회 7일 만에 진눈깨비가 내렸는데 심지화상 둘레 10자쯤은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신기하여 법당에 안내했다. 여기서 그는 열심히 수도하여 영심으로 부터 법통을 계승하고 간자를 받았다. 경내에 문화재는 금당암 3층석탑(보물248호) 석조 비로 자나불(보물244호) 3층석탑(보물247호), 마애불상(보물243호), 당간지주(보물254호)등이 있다.

 

팔공산의 유래

원효스님이 내원사가 있는 원효산에서 기도할 때 멀리 중국 땅에서 원효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성불하려고 1,000명의 공들이 찾아왔다.

매일 득도를 하기 위하여 가르침을 받아 992명은 성불이 되었는데, 나머지 8명만은 아무리 가르쳐도 득도를 못해, 원효스님은 공산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 도를 깨우치니 8명의 공이 득도했다 하여 팔공산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때 1,000명이 기도했다는 내원사 뒷산을 천성산이라 무른다.

 

파계사 (대구시 동구 중대동)

신라 애장왕 5년(804년)에 심지 왕사가 초창하고 조선조 14대 선조 38년(1605년)에 계관법사가 소실된 원통전을 중건하고 숙종21년(1695년) 현응조사가 기영각과 성전암을 중수하였다.

【전설】

숙종 때 파계사를 중수하신 현응조사의 이야기다.

배불 정책이 극심하여 모든 절의 스님들은 부역에 나가 혹사를 당하고 지방유생들의 횡포가 심하였는데, 현응스님은 이를 임금께 탄원하기 위하여 속세의 옷을 입고 성안에 들어가 3년이나 밥집 심부름을 하며 기회를 엿보았으나 때를 얻지 못하여 발길을 돌리는 날, 남대문 근처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날 밤 숙종 임금은 남대문 근처에서 청룡이 승천하는 꿈을 꾸고 기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찾게 하니 현응이 짐을 꾸리고 있었다. 현응의 법명이 용피였었다. 현응은 어전에 나가 불교 탄압의 실정을 알리고 수도하는 자가 없으면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하니 숙종은 그의 탄원을 들어주는 대신 왕자를 얻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현응은 평소 친분이 있던 삼각산 금성암의 농상스님과 함께 잉태를 기원하며 100일을 기도하였지만 숙종의 사주에 세자 될만한 인물이 없어, 농상에게 세자 되기를 권유 농상은 어느 날 밤 숙빈 최씨에게 현몽케하고 뒤에 영조대왕이 된 세자로 다시 태어났다. 숙종은 현응의 공을 높이사 파계사 둘레 40리에 걸쳐 나라에 내는 세금을 파계사에서 거둬들이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를 사양, 대신 선조임금의 위패를 모시도록 해달라고 청원해 뜻을 이루어 경내에 개영각을 짓고 선종·숙종·덕종·영조 네 분의 위패를 모심으로 유생들의 행패를 막았다. 전생의 농상스님이 세자가 되어 11살에 썼다는 형응전이라는 현액이 지금까지 성전당 법당에 걸려있다.

 

갓 바위 부처 (보물 431호)

달성군 공사면 팔공산 소재로 신라 27대 선덕여왕 7년(638년) 원광법사의 수제자인 의현이 작고한 어머니를 위해 조성한 미륵보살인데, 이목구비와 자비로운 얼굴이 잘 조화되며 석불 뒤에 바위는 바람을 가로막아 풍화를 방지하며 잘 어울린다. 머리에 큰 갓을 썼다 해서 갓바위라고 부르는데 매달 초하루 초사흘, 보름 등에 많은 참배 객이 모이며 여기에 시주하고 소원을 빌면 효험이 있다 하여 특히 아들 낳기를 원하는 아녀자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영천 은해사 (영천군 청통면 치일동)

영천군 청통면 소재로 신라 41대 헌덕왕 원년(809년)에 혜철국사가 창건하여 해안사라 하였다가 조선 12대 인종때 불이나 소실된 것을 13대 명종때(서기 1546년) 천고대사가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 하였다.

 

동명 송림사 (칠곡군 동명면)

칠곡군 동명면 구덕동에 위치.

신라 진흥왕 5년 각덕조사가 양나라 사신과 함께 귀국하여 흥륜사에 불타의 사리를 처음 봉안하고 뒤를 이어, 진나라 사신이 명관대사를 대동하고 불 서적 2,700권과 불 사리를 받들어 왔는데, 유명 사찰에 분봉할 때 팔공산을 대표하여 이 절에 5층 전탑을 세웠다. 1959년 이 탑을 해체 복원시 순금 및 자기 등이 나와 국립 박물관에 보물325호로 지정되어 보관되었고 전탑은 보물 189호로 지정되었다.

 

삼존 석굴사 (군위군 부계면 남산동)

경북 군위군 부계면 소재로 일명 제2의 석굴암이라 불리는 이 사찰은 신라 소지왕때 창건되었으며 국보 109호로 지정된 삼존불은 거대한 청 적색 절벽 중 지상 20m지점, 자연 암굴 중앙에 석가여래 좌상을 안치하고 좌우에 등신대의 보살입상을 세운 것이다.

 

수도산 청암사

신라 47대 헌안왕 2년(서기 855년) 도선국사가 창건하였고 인조 25년 불로 소실된 것을 허정 화상이 재건하였으며 정조 7년에는 환우, 대운, 두 화상이 20여 성상에 걸쳐 중건하였고, 수도암에는 보물 307호인 바로자나불과 297호인 약사 여래상 등이 있다.

청암사 계곡은 막고 찬 계류와 울창한 수림으로 풍치와 산수미의 극치를 이룬다.

 

청도 운문사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

경북 청도군 운문면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24대 진흥왕21년(560년)에 신승이 득도하여 창건하였고 서기 591년 원광국사가 중건하였으며 신라말기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왔던 보양스님이 이 절은 중건하니 조선 태조가 공에 보답으로 쌀 50석을 하사하고 운문 선사라 사액하니 그때부터 운문사라 불렸다 한다. 경내에는 보물 193호 석등208호 청동호316호 원진국사비318호인 사천왕 석주 등이 있으며 천연기념물 18호인 반송(일명 처진 소나무)이 있다. 밑둥치가 두 아름이나 되는 이 소나무는 키가 6m밖에 안되지만 가지가 땅으로 처진 채 둘레 10m나 된다.

수령 약 400년으로, 어느 대사가 시든 나뭇가지를 꽂은 것이 성목으로 자랐다 하며 임진란 때 운문사가 불타는 와중에도 이 소나무는 칡넝쿨이 감싸 타지 않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400여년이 지났건만 무성한 것은 매년 4월과 9월 절에서 막걸리 12말을 받아 소나무 둘레를 파고 부어 주며 반송의 장수를 빌어준다. 우리 나라 최초의 막걸리 마시는 소나무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의성 고운사 (의성군 단촌면 구계동)

신라 30대 문무와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높을 고 구름운자, 고운사로 불리우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가운, 우화, 양추를 건립한 것을 기념으로 최치원 선생의 호인 외로울 고 자를 써서 고운사로 개명하였다. 조선조21대 영조 임금 때는 쾌첨을 연수전에 봉안하였고 우화루에 걸린 고운사란 글씨는 해광 스님이 썼다는데 구름운자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하다. 절 뒷산인 등운산에는 송림이 우거져 송이버섯이 많이 나고, 경내에는 보물 246호인 석조 석가여래 좌상이 있다.

 

안동시

양반 고을로 이름난 안동은 1963년 시로 승격되었고 안동댐을 비롯 영호루 등의 관광지가 있으며, 민속 문화재로 하희 가면놀이와 차전놀이, 놋다리밟기 등이 전승되어 온다.

 

하회 가면놀이

옛부터 정초에 부락제를 지낸 뒤 탈춤 놀이를 해온 것. 이것을 하회 별신굿이라 부르며 이때 쓰던 가면의 제작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허도령이 신의 계시를 받아 만든 것이라 하며 국보 121호로 지정되었다.

 

차전놀이

약 천년전 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기 위하여 안동으로 진격했을 때 이 지방의 삼태사와 고려 태조 왕건이 합세하여 그를 물리쳤는데 이 대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해마다 행사를 벌여 전승되었다.

 

놋다리밟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까지 피난, 이때 예천을 지나 안동으로 행차중 다리가 없는 냇물을 건너기 위해, 부녀자들이 엎드려 인교를 만들어 왕과 공주를 건너게 했다는 데서 유래가 되어 민속놀이로 전승되었다.

 

안동 신세동 7층 전탑(일명 법흥탑)

국보 16홍인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이곳에 있던 법흥사의 탑으로 높이 16.4m의 우리 나라 최고의 전탑이다.

 

임청각

고성 이씨의 종가 집으로 보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원래는 99칸의 양반 집이었으나 중앙선 철로 공사로 지금은 약 33칸 정도이다.

 

안동댐

보조댐 : 길이 218m 높이 20m 수문이 10개이며 본 댐에서 방류된 물이 가두어 두었다가 본댐의 수위가 부족하면 다시 본 댐으로 역수시키는 댐이다.

본 댐 : 총 공사비 415억을 들여 1971년 착공하여 1976년 1울에 완공되었으며 높이 83m 길이 612m 하루 9만㎾의 전기를 발전할 수 있으며 농업용수, 식수, 홍수조절 등으로 다목적댐이며 사력 댐이다.

 

도산서원(사적 170호) (안동군 도산면)

이율곡과 더불어 조선조 유학의 양대 산맥, 퇴계 이황 선생은 지금도 도산면에 진사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7살에 아버지가 별세하시고 34살에 문과에 급제하시었고 1568년 대제학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셨고 1570년 돌아가시자 1574년 유림들이 그 자리에 상덕사와 전교당을 짓고 제향을 모셨다. 1575년 선조임금께서 한석봉의 글로 된 사액을 내려 서원을 개창하니 우리 나라 최대의 도산 서원이다. 1792년 정조 임금은 서원 앞 지금의 시사단에 과거를 보인바 있으며, 친히 발문을 써 서원에 보존케 하셨다.

서원 내에 상덕사(보물 211호), 전교당(보물 210호)등 20여점의 유물이 있으며 약 5,000여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다.

 

청송 주왕산

주왕산은 해발 720m이며, 한국 8경중의 하나로서, 설악의 장엄함과 월출산의 날카로움에 비해 주왕산은 절묘함을 자랑한다.

1976년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어 국립공원중세서는 제일 적은 면적이나 마치 계란의 노른자위처럼 알차고 하나도 버릴 데가 없는 산이다.

원래는 기암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하여 석병산이라 하였는데, 약 천년전 고려 시대 때 중국 동진의 왕족인 주도가 후주 천왕을 자칭하고 당나라 덕종을 거쳐 고려 땅에 들어와,  석병산의 험한 지세에 숨어 재기의 날을 기다릴 때 당나라의 부탁을 받은 고려는 마일성 장군 형제를 이 곳에 보내 정벌케 하여 주도를 죽이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주도가 숨었던 산이라, 주왕산이라 부르고 그가 기거했던 굴을 주왕굴, 무기를 저장하였다는 무장굴, 주왕의 아들 대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대전사와 주와의 딸의 이름을 붙인 백련암 등이 있으며 계곡의 폭포 등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달기약수 (청송군 청송읍 부곡동)

조선 철종 때 금부도사 권성하가 수로 공사 중 바위틈에 버드나무를 뽑다  가스와 함께 물줄기가 솟아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맛을 보았더니 속이 편하여 약수터로 알려졌으며 마셔 보면 신맛과 특유한 향과 사이다 맛 등이 나며 빈혈, 위장병 등에 약효가 있다하여 여름철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약수 물에 닭을 고아 백숙을 즐기며 이 약수로 밥을 지으면 새파란 색깔이 나고 닭을 고으면 연해지고 맛이 좋으며 그 영양을 고스란히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제비원 마애 석불 (보물 115호)(안동시 미천동)

신라 선덕 여왕때 만들어졌으며 높이 12m의 암벽에 모체를 조각하고 머리부분을 따로 조각하여 만든 거대한 불상이다.

【전설】

이 불상을 조각할 때 그 당시 이름을 날리던 석공에게 부탁을 하였는데 그의 제자가 더욱 that가 뛰어났다. 샘이 난  큰 석공이, 후배가 절벽에 사다리를 놓고 일을 하는데, 사다리를 치워 버렸다. 그러자 그 석공은 제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 버려, 그 연유로 제비원이라 부르며, 옛날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안동 도호부에 왔을 때 이 부처의 목을 치니 붉은 피를 흘리는지라, 겁을 먹은 소정방이 엎드려 사죄하였다 한다. 지금도 가슴 부근의 붉은 것은 그때 흘린 핏자국이라 하며, 임진왜란 때에는 구원군대장 이여송이 재상 유성룡과 이곳을 지나다가 말발굽이 땅에 붙어 꼼짝 하지 않아, 이 석불에 예불하니 움직여졌다는 이야기가 있고 옛날부터 유명하던 안동 소주도 이곳 이름을 따 제비원소주로 불리웠다 한다.

 

봉정사 (안동군 서후면 태압동)

이 절은 신라 30대 문무왕(서기 672년)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의상대사가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이 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히고, 청마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짓고 절 이름을 청마가 앉았다하여 봉정사라 했다고 한다. 이 절의 극락전은 국보 15호로 지정되었으며,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아울러 우리 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무로 알려져, 고건물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안동 하외마을 (중요 민속 122호)(안동군 풍천면 하회동)

경북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 소재. 이 마을은 풍산류씨가 대대로 살아오던 전형적인 동성 부락으로서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사대부 집으로부터 하층민의 집까지 130여호의 대소 고가들이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곳은 조선조 대 유학자 문경공 류운룡선생과 그의 동생, 임진왜란때 영의 정 문충공 류성룡선생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하회의 지형은 자고로 태극형이니 연화 부수형이니 다리미형으로 일러왔고 낙동강이 흐르다 S자 형으로 굽이며 마을을 감싸 돌아 지명이 하회가 되었다. 동쪽으로 태백산 지맥인 화산이 있고 그 줄기 끝이 강에 쌓인 동네까지 뻗어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다. 집들은 구릉을 중심으로 낮은 곳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집의 좌향이 일정하지 않고 동서남북을 향한 각 방향의 집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을 중심부에 류씨들의 집인 큰 기와집이 있고 가람 집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배치되어 있다. 마을에는 하회별신굿과 선유 줄불놀이가 동네 행사로 전래되어 오고있고, 이때 사용하던 하회탈 12개중 9개가 국보 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류씨들의 대 종가인 양진당과 서애 종가인 충효당이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중요 민속자료 여러 점이 보존되고 있다.

 

소수서원 (영풍군 순흥면 내죽리)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이며 조선 중종 38년(1543년)주세붕이 군수로 있을 때 창건한 서원이며 처음에는 백운동 서원으로 불리우다 1549년 소수서원으로 불렀다. 고려 시대의 대 학자인 안향을 제사 지내며 조선 대원군때 서원 철폐 때에도 제외된 곳이다.

 

부석사 (영풍군 부석면 북지리)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였고 고려 때 원융국사가 고려 때 원융국사가 중건하였다. 의상대사는 신라 진평왕 47년에 계림부 김한진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무열왕 원년 29세대 경주 항복사에 입산 수도한지 8년만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화엄학을 전공하고 10년 후 문무왕 11년 당나라와 국교가 악화, 30만 대군으로 신라를 침공하려는 것을 알고 환국하여 왕에게 고하고 대찰을 건립하고자 전국을 다니시다가 이곳 부석에 명산 대지로 정하셨으나 벌써 이곳에는 권종이도가 500명을 끌고 점령하고 있어, 양보해 달라고 수차 간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의상 조사가 입산하기 전 16세대 약혼을 한 선모화라는 아가씨가 있었으나 대사를 사위로 탐내는 재상집의 간교로 당나라에 처녀 공출되어 당나라 수위 대장의 수양딸로 되었다. 선모화는 불심으로 기도하고 용으로 변하여 의상대사를 지키러 다닐 때 절터 관계로 고심하는 것을 알고 큰 바위를 세 번이나 공중에 뜨게 하니 권종이도의 무리들이 놀라서 해산하였다. 선모화는 돌로 된 용으로 변해 지금의 무량수전 자리에 누우니. 선모화의 정성이 지극히 무량하여 그 자리에 길이 48척의 석용을 지하 3척에 묻고 법당을 지으니 이 법당 이름이 국보 18호인 무량수전이다. 경내에는 국보 17호 석등. 국보 19호 조사당. 국보 18호 무량수전, 국보45호 소조 국보 46호 조사당벽화. 보물 220호 석조 여래 좌상 보물249호 삼층석탑 보물 255호 당간지주 등의 문화재가 있다.

 

오전약수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소재, 조선조 9대 성종 때 보부상들을 통해 알려졌다는 이 약수는 탄산수로서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이며 공기와 물이 맑아 피서·휴양지로 개발중입니다.

 

풍기 인삼

1545년 조선 중종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산삼씨를 구해 재배를 장려했다는 풍기 인삼은 7월에 곱게 친 모래흙과 씨를 섞어 배수가 잘 되는 모판에 심어 물을 자주 주고 정성 들여 키워 이듬해 봄에 종삼이라 불리는 묘목을 본 밭에 심어 햇볕을 가려주는 가리개를 씌우고 만 3∼4년간을 공들여 키운 다음 처서가 지난가을에 수확하며, 풍기 인삼은 예로부터 개성 인삼과 금산 인삼과 아울러 우리 나라 3대 인삼 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희방사 (영풍군 풍기읍 수철동)

신라 27대 선덕여왕 12년(서기643년)에 두운대사가 창건하였고 조선 철종임금때 강월대사가 중창하였는데 6·25때 모두 불타 1954년 안대근스님이  잡초만 우거진 자리에 다기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공주가 이름 모를 병이 들어 고생하다가 이곳 절에 와서 불공을 드리니 완쾌되어 임금께서는 기뻐하며 크게 웃었다고 하며, 기쁠 희자를 써서 희방사라는 절 이름이 되었다 한다.

【전설】

두운 대사가 지금의 절터에 초당을 짓고 수도를 하고있는데, 큰 호랑이가 나타나 뭔가를 호소하는 것 같아서, 나가보니 목에 여인의 비녀가 걸려 있었다. 두운대사가 비녀를 뽑아주며 호통을 쳤다 이놈 짐승들도 많은데 사람을 잡아먹어, 벌을 받을 것이니 다시는 사람을 해치지 마라. 호랑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며칠 후 쿵소리가 나서 대사가 나가보니 산돼지를 호랑이가 잡아왔다. 이놈아 중이 고시를 어찌 먹느냐 너마 먹어라 했다. 또 며칠후 이번에는 어여쁜 처녀를 업고 온 것이다. 어쩔 수없이 기절한 처녀를 방에 안고 들어와 물을 먹이고 주물러 소생시켰다. 처녀의 사연을 들어보니 계림(지금의 경주)의 호장 유서의 무남독녀인데 그날 혼인을 하고 신방에 들었는데 별안간 불이 번쩍하고 몸이 공중에 떴는데 그 다음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산은 깊고 눈이 많이 와 봄철이 와야 마을에 내려갈 수 있어 할 수 없이 함께 석달을 지내는 데, 처녀는 이것이 평생에 내 연분인가 생각하고 차차 사랑을 느껴 유혹도 해 보았으나, 중이 여인을 안으면 불덩이를 가슴에 안는 것 보다 더 무섭다는 가르침을 외우면서 좌선하였다 드디어 봄이 되어 두운도사는 처녀를 데리고 경주의 유호장 집에 도착하니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이 살아오자, 큰 잔치를 열고 유호장은 두운대사에게 자기 딸과 결혼해줄 것을 바라니 스님은 끝내 거절하였다 이에 유호장은 은혜를 갚기 위해 절을 크게 중수하였다 한다.

 

도리사

태조산 도리사는 신라에 불교를 전한 무호자 아도화상이 모례라는 사람에게 천섬의 시주를 받아 눈 속에 오색 도화가 피어 있는 지금의 터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불렸다 한다. 1976년 아도화상의 석상이 발견되었고 1977년 4월 담장밖에 있던 부도 형 세존 사리탑을 극락전 후방으로 옮기기 위해 해체 복원시 세존 진신사리가 발견되어 전국의 신도들이 사리를 친견하기 위하여 이곳에 쇠도 하여 큰 혼잡을 겪은 일도 있으며 경내에는 보물470호인 삼층석탑이 있다.

 

김룡사

해발 1,099m운달산 남쪽 기슭에 있으며 신라 27대 진평왕 10년(서기 588년)에 운달조사가 창건하여 운봉사라 하였는데 김룡사라 칭하게된 유래는 조선시대 문경부사로 있던 김모씨가 아들이 없어 이 절에 은거, 불공을 드리니, 선녀를 만나 아들을 얻어 룡이라 부르고 절 이름을 김룡사라 부른다고 한다.

【전설】

옛날 김룡사에 수도하기 위해 많은 스님들이 오였는데 그중 영리하고 총명한 동승이 있었다. 어느 날 동승이 상추를 씻으러 앞개울에 가서 부지런히 상추를 씻는데 갑자기 산너머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면서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산 너머에 있는 대승사 절이었다.

대승사 스님들은 불길을 잡지 못해 당황하고 있었다. 동승은 자기도 모르게 염불을 외우고 상추를 담아왔던 그릇에 물을 퍼서 불타고 있는 절을 보며 퍼붓기 시작하니 불길이 잡히고 곧 완전히 꺼졌다. 정신을 차리고 상추에 보니 조금 밖에 없었다 동승은 급하게 나머지 상추를 씻어 절로 뛰어가니, 기다리다 지친 주지 스님이 화가 나서 동승의 다리에 매질을 하였다. 그날 밤 동승 옆에 누운 스님이 웬일로 맞았느냐고 묻자 동승은 낮에 일어난 일을 설명했지만 믿으려 하지 않았다. 동승은 김룡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말았다. 이튿날 동승이 없음을 알고 찾다가 한 스님이 대승사에 가니 과연 전날 불이 났었는데 어디서 상추와 물줄기가 날아와 불이 꺼졌다고 한다.

김룡사에 돌아와 주지 스님께 사실을 알리니. 동승의 불심을 크게 칭찬하였지만 떠나간 동승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경새재

새재는 추풍령, 죽령과 함께 영남과 서울의 관문이며, 주흘산과 조령산의 계곡으로서 옛부터 군사의 요충지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의 군사가 합류한곳이며 조선 숙종 34년(1708년)에 남북으로 80리에 성을 쌓아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등의 관문을 만들어 지나는 사람을 검문 검색하였다 한다. 새재 주위에 박달나무가 자생하며 전에는 버스도 이 길을 다닐 수 있었으나 문화재의 보호목적으로 통행을 금지시켜 이화령으로 통행하게 되었다.

【전설】

임진란의 명장 신립이 장군이 되기 전 과거를 보기 위해 이 고개를 넘는데 해가 저물어 외딴 집에 하루 유숙할 것을 청하니, 어여쁜 아가씨가 나와 이곳에 큰 호랑이가 나와 부모님을 다 잡아먹고 오늘밤에 마지막으로 나를 잡아먹을 날이니 호환을 당하지 말고 빨리 피하시라고 하니, 담이 크고 힘이 장사인 신립이, 내가 호랑이를 처치해서 아가씨의 원수를 갚아 드리겠으니 염려 마시오, 과연 자정이 되자 집채만한 호랑이가 나타나니 신립이 단 칼에 처치하였다 날이 새어 한양으로 떠날 때 이화라는 그 아기씨가 생명의 은인이신 도련님께 제 몸과 마음을 드립니다. 하니 신립은 약혼자가 있어 거절하였다. 사정하는 이화를 두고 길을 떠나자, 이화는 초가지붕에 올라가 이승에서 못 다한 사랑을 저승에서 하겠다며, 한을 품고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세월이 흘러 신립은 무고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큰 전투를 앞둔 날 저녁이면 꼭 꿈에 아가씨가 나타나 선몽을 하니 그대로 하기만 하면 싸움에 이겨 나라에 큰공을 세워 장군이 되었다. 북상해오는 왜군들을 막기 위해 천연요새인 새재에 진을 치고 있는데 또 꿈에 이화가 나타나 장군님 이곳에서 적을 맞으면 패하오니 충주 달래강에 물을 뒤로하고 배수진을 치면 꼭 이길 것입니다. 하니 그 말을 믿은 신립 장군이 후퇴하여 충주 탄금대 달래강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의 대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 부족으로 대패하고 신립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승에서 못한 사랑 저승에서 하겠다는 이화아가씨의 한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이야기며 이화령고개는 이화아기씨의 이름을 따서 부른다고 합니다.

 

상대 온천 (경산군 남산면 상대동 590)

조선 중엽부터 대처곡 온암정이라 불려진 이곳 바위샘은 한 겨울에도 얼지 않아 동네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이용되어 오다가 1972년 이 지역 일대의 논에 늦게 모를 심으면 자구 떠오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농부가 석유가 묻힌 것으로 알고 국립지질연구소에 조사를 의뢰하여 시추한 결과 온천수가 솟아져 나와 개발되었으며, 알칼리성 온천으로 섭씨 29도이며 황산, 이온, 칼슘, 마그네슘, 철분 등이 함유되어 위장병, 류마치스, 피부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박달나무

문경새재 하면 박달나무가 연상될 만큼 유명했던 이 나무도 무지한 도벌군에 의해 도벌되어 지금은 보기 힘들어졌다. 박달나무는 자작나무 과에 속하며 주로 산허리 깊숙한 곳에 자라기 때문에 목질이 단단하여 홍두께, 방망이 또는 빗, 조각품을 만들며 잘 자라나지 않기 때문에 20년을 커도 지름이 1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주                                                                                               관광지 미리보기 ☞클릭!


승객 여러분 이제 여러분께서는, 경주 톨게이트를 벗어남으로서 신라천년의 고도 경주 땅에 들어섰습니다. 경주는 신라 때는 서라벌 또는 사로라 불리었고, 1955년에 인구 약 10만으로 시로 승격되었으며, 면적 190평방㎞, 국보 15점, 보물 23점, 사적 48개소 등 약 180점의 유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라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워 56대 경순왕까지 992년이나 존속하였으나 전성기에는 집이 17만8천9백36호로 인구가 약 80만에서 100만에 이르러 세계 4대 도시에 들어갔다고 하니 동양문명의 제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옛날에는 이 길을 화랑들이 말을 타고 다렸으나 오늘 여러분은 ○○관광을 타고 신나게 달리고 계십니다.

 

나정

여러분 정면 우측을 보시면 소나무 숲이 많이 우거진 곳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저곳은 나정이라는 곳으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왕이 태어나신 곳입니다. 신라가 있기 전에는 6부 촌장들이 통치를 하였는데 어느 날 그들이 따로따로 가려 사느니 한 임금을 섬기고 뭉치자는 의논을 하는데, 나정숲속에서 흰 것이 너울너울하여 가보았더니 흰말이 박같이 생긴 알에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놀란 일행이 정신을 차려보니 말은 간 곳이 없고 소벌공이란 사람이 알을 깨어보니 옥동자가 나왔는데 이때가 기원전 70년이었다. 어린아이 몸에서 광채가 나고, 온갖 짐승들이 같이 놀았으니 하늘이 주신 아들이라 하여 잘 기르게 하였으며, 박같은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박씨로 하고 이름을 혁거세라고 하였다. 13세가 되던 해 모든 사람이 받들어 임금으로 모시니 그가 시조 임금이신 박혁거세 왕이다.

 

오릉

여러분 좌측을 보시면 소나무 숲속에 커다란 무덤들이 보입니다.

저것은 오릉으로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부인,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다섯 분의 유래가 고이 잠들어 계신 오릉이며, 일명 사릉이라고도 부른답니다. 박혁거세 왕이 승천한지 7일 만에 유해가 다섯으로 나누어 떨어짐으로 합장하려 하였으나 큰 뱀이 나와 방해하여 부득이 다섯으로 나누어 매장한 것이 오릉이라 한다고 하며 뱀사자를 써서 사릉이라고도 한답니다. 나정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13세때 임금으로 받들고 오릉 동편 알영 우물가 계룡에서 태어난 알영을 왕비로 삼았으니 기원전 57년이고 좌측에 보이는 기와집은 숭덕전으로 시조 왕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고 뒤에는 알영부인이 태어난 알영정을 지금도 보존하고 있습니다.

 

포석정(사적1호)

포석정은 주연과 향락을 위한 이궁이었고, 소위 유상곡수의 잔치를 베풀었던 자리이며 30대 문무왕 때는 당나라 사신을 위해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답니다. 전복모양의 홈을 다라 남산에서 끌어들인 물이 흐르면 술잔을 띄워 자기 앞에 오면 마셨다고 하며, 나라를 돌보지 않고 주색과 방탕으로 놀아나던 55대 경애왕이 이 자리에서 향락을 즐기다 후백제 견훤의 군사에 기습을 받아 경애왕을 강제로 자살시켰고, 왕비와 궁녀들을 욕보였다 고한다.

 

남산

지금 고개를 오르고 계십니다. 고개 오른 쪽 산이 해발 468m 남산입니다. 남산을 일명 금오산이라고도 부르며 신라인들이 신령시한 산이었고 시조 왕이 태어나신 곳도 남산 나정이었으며 30여 계곡에는 무수한 절들이 있어 화랑들의 훈련장이었다 합니다.

 

반월성

이제 좌측을 보시면 나지막한 산이 보이는데 저곳은 산이 반달 같이 생겼다 하여 반월성이라 불렀고 원래는 호공이 살던 집이었으나 4대 석탈해 임금이 궁궐로 만들었다 합니다.

 

석빙고

저곳에는 오늘날 냉장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석빙고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석빙고는 보물 6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라 22대 지증왕 서기505년에 만들어져 겨울에 형산강의 얼음을 떠다 저장하여 여름에 임금과 신하들이 사용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신라 때 석빙고로 알려졌으나 서기 1741년 조선 영조 17년에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적힌 돌이 발견되어 조선 영조때 것임이 밝혀졌다.

 

박물관

왼쪽에 보이는 웅장한 큰 건물이 경주 박물관으로서 1968년 착공하여 1975년 7월 2일 준공을 보았으며 국보, 보물 등 수천 점을  전시 보관하고 있답니다. 특히 이곳에는 우리 나라 w국보 제 29호인 신라 33대 성덕대왕의 신종, 일명 에밀레종이 있으며 이 종은 신라 천년 역사중 가장 전성기였던 서기 700년에서 750년 사이 백성들은 가야금, 거문고를 즐겼고, 하얀 옷을 지어 입었으며, 거리가 더러워 질까봐 숯으로 밥을 해 먹었으며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니 35대 경덕왕께서, 정치를 잘하신 성덕대와을 본받아 후대의 왕들도 정치를 잘 하라는 뜻에서 큰 종을 만들었으나 실패하여 그이 아들 36대 혜공왕께서 청동12만근을 들여 완성을 보았답니다. 에밀레종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왕의 명을 받은 수만은 중들이 전국 각지로 시주를 받으러 다녔다 절이나 종은 신자들의 시주로 이루기 때문이다. 어느 한 스님이 가난한 집에 시주를 청하였으나 너무 가난하야 시주할 수 없으나 딸 하나가 있으니 필요하면 드리겠습니다 하여 스님은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시주 책에 적어 가지고 돌아왔다. 드디어 종을 만들리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번 주조하였으나 실패를 거듭, 몹시 초조해 졌는데, 누구 한사람이 끓는 쇳물에 사람을 넣으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누가 들어가겠는가 아무도 들어갈 사람이 없었다. 그때 시주를 얻으러 다니던 스님이. 딸을 주겠다던 여인이 생각나 그 집을 찾아가 딸이라도 달라고 하였다 부처님과 약속을 어길 수 없는 여인은 울면서 딸을 내놓았다. 이리하여 펄펄 끓는 쇳물에 그 딸을 넣어 종을 만드니 훌륭하게 되었는데 종을 칠적마다 종소리와 함께 에밀레 에밀레 하는 소리가 들려, 사람들은 이 소리가 필시 어머니를 그리는 달이 어머니 어머니하고 우는소리라 하여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렀다 합니다. 이제 왼쪽으로 가시면 경주시내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불국사와 울산으로 가는 길이 되겠습니다.

 

황룡사

여러분 이제 왼쪽을 보시면 논 가운데 흙무덤이 군데군데 보이게 됩니다. 저곳은 신라 최대의 절이 있었던 황룡사의 절터입니다. 이 절은 신라 24대 진흥왕이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는데 꿈에 황룡이 나타나 선몽하여, 절을 지으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 하며 국왕이 친히 나와 법문을 들었으며 신라 3보의 하나인 9층목탑이 있었고 신라의 화가 솔거의 노송벽화가 그려졌던 절이 바로 이 절이었고 서기 754년 35대 경독왕대 주조된 세계 최대의 종, 무게 49만7천5백81근이 들은 종이 있었다. 이 종은 에밀레종의 4배반이나 크다고 하니 과연 세계 되고의 종이나 지금은 찾을 수가 없고 간 곳을 모르니 안타까울 뿐이랍니다. 전설에 의하면 몽고 군이 탐을 내어 동해 양남 앞바다에서 배에 실어 가져가는데 갑자기 태풍이 불고 종이 너무 무거워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 찾을 길이 없고, 지금도 태풍이나 폭풍이 치는 날에는 동해바다 양남 앞바다에는 종소리가 들린다고 전하며, 서기 1238년 몽고 난으로 전부 소실되어 절터만 남은 것을 발굴하여 오늘에 이른답니다.

 

분황사

또 여러분들 왼쪽을 보시면 아담한 절과 탑을 볼 수가 있는데 저 절은 분황사입니다. 분황사는 27대 선덕여왕(서기634년)때 창건한 걸로써 높이 18m나 되는 9층모전 석탑이 있었으나 몽고 난과 임진란으로 6층이 소실되고 지금은 3층만 남아 있으며 1915년 보수때 2층에서 석함과 구슬, 금으로 된 각종 유물이 발견 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원효대사께서 도를 통하려고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다가 깜깜한 밤에 지쳐 길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목이 말라 더듬더듬 물을 찾다가 바가지에 물이 고인 것을 맛있게 먹었던 물이 해골바가지에 빗물이 고였던 물을 마신 것을 알고 매스꺼워 구토를 하고 깨달은 것이 법성종이라는 큰 종파였다. 그후 마지막 찾아오신 곳이 분황사였고 이곳에서 13년간 수도와 설법을 하고 입적하시니 지금도 이 절에서 원효스님의 제사를 매년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오른쪽 길로 가시게 되면은 감포와 양남 그리고 보문단지를 갈 수 있는 길이 되겠습니다.

 

보문단지

보문단지는 1971년 대통령 각하의 특별지시로 1974년 10월 착공 오늘에 이르렀으며 총부지 312만평이며 1,164억원을 투자 호텔, 테니스장, 골프장, 호텔, 학교 등이 있으며 특히 인공호수인 보문호의 백조호 뱃놀이는 운치를 한결 더 돋보이게 한답니다. 옛 신라가 천년 사직을 지켰던 것은 남쪽에는 금오산 서쪽에는 선도산 동쪽에는 토함산과 명활산이 버티고 있어 천연적인 성의 역할을 하였으니 그 덕도 상당히 보았으리라 생각되는군요.

 

석탈해 왕릉

우측 소나무가 우거진 곳을 보시면 커다란 무덤을 보실 수가 있는데 저 무덤은 우리 나라 석씨의 시조이고 신라 4대 임금이신 석탈해 왕릉이 되겠습니다. 석탈해 왕은 기원전 9년 바다를 건너 동해안 화진포에 상륙 2대 남해왕의 사위가 되어서 62세에 4대 임금에 즉위하신 분입니다. 원래는 무덤이 그의 상륙지 화진포에 있었으나 삼국 통일을 이루신 무열왕 때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간단하나마 길 양쪽으로 지나친 고적들의 설명과 전설을 들으셨습니다. 여기서부터 포항까지는 약 28㎞로서 20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화랑의 집

여러분 우측 저 멀리 남산 기슭을 보십시오. 커다란 기와집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저곳은 화랑 교육원으로서 삼국중 제일 약소국이던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이겨 통일을 하기까지는 화랑의 힘이 컸었습니다. 화랑도는 임금에게는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벗을 사귐에 믿음이 있어야 하고, 싸움에 물러서지 않으며, 살생을 하되 가려서 하라는 세속 5계를 신조와 규범으로 지켰다. 우리도 화랑정신을 이어받아 남북통일을 이루기 위해 후예들의 교육도장을 지으니 총 공사비 2억7천만 원으로 71년 11월 착공하여 73년 5월 준공을 보아 도내 중·고생을 대상으로 3박4일간의 교육을 통해 심신의 단련을 시키고 있답니다.

 

신문왕릉

좌측에 보면 숲속에 커다란 능이 보입니다. 저 무덤은 신라 31대 신문왕의 무덤입니다. 30대 문무왕은 돌아가실 때 태자에게 내가 죽거든 나를 화장하여 동해바다에 수장해 달라 그러면 내가 죽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킬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돌아가시자 31대 신문왕은 유언을 받들어 지금의 양남 앞 바다에 수장하여 장사지내고 100일제를 지내니 마지막날 안개 속으로 해용이 승천하면서 부표를 주며 왜구가 쳐들어오면 바다에 던져라 그리하면 파도가 일어 왜적을 수장할 것이다 하였답니다. 지금 양남 앞 바다에 수중릉을 대왕암이라 부르고, 100일제를 지낸곳을 이견대라 하여 사적 15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답니다.

 

통일전

다시 왼쪽을 보시면 남산 밑에 커다란 건물이 보이게 됩니다.

저것은 통일전으로서 신라 삼국통일에 가장 공이 많았던 세분의 영정을 모시고 우리도 그분들의 얼을 받들어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뜻에서 77년 9월 완공을 보았다. 공사비 6억4천4백만 원을 들었으며 바닥은 안압지에서 출토된 보상화 문전으로 깔았다 합니다.

 

서출지 (통일전옆 연못)

신라 21대 소지왕 즉위 10년(서기 438년) 왕과 신하들이 사냥을 나갔는데 까마귀와 쥐가 울고 있었다. 쥐가 사람들의 말로 까마귀가 가는 곳을 가보라고 하였다. 왕은 기사를 시켜 까마귀를 따르게 하였더니, 남산 동쪽 기슭에 이르렀을 때 멧돼지 2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다가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부근을 헤매고 있을 때,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와 글쓴 것을 바쳤다. 그 글을 임금께 바치니 겉봉에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라고 적혀있어 임금은 두 사람이 죽는다면 안 펴서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게 좋은 일이다 하니 일관이 말하기를 한사람은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도 그렇게 여겨 열어보니 금갑을 활로 쏘아라 하였다. 왕이 궁에 돌아와 금갑을 활로 쏘니 그 속에 궁에서 수도하던 중과 왕비가 간통하여 왕을 죽이려 숨어 있다가 그만 활에 맞아 죽었다. 그후 왕은 서찰이 나온 못이라 하여 노인과 나온 못을 서출지라 하였다. 여러분은 경주에 들어오면 커다란 무덤과 능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무덤의 크기는 그 신분의 높고 낮음 재산에 따라 달라지고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경주 부근 약 300여 개에 달한답니다. 이제 바로 가면 울산이 되겠고, 좌측으로 가시면 불국사와 석굴암이 되겠습니다. 로터리에 탑이 보이는데 저 탑은 계성탑으로서 합장하여 열바퀴을 돌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여 열계자 이룰 성자를 써서 계성탑이라고 합니다.

 

불국사

이제 잠시후 여러분은 구름을 먹고 토한다는 해발 745m토함산 기슭에 자리한 불국사에 도착이 되겠습니다. 불국사는 이차돈이 순교한 다음해에 불교가 공인이 되고 서기 528년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왕비 기윤부인이 머리 깎고 비구니 가되어 절을 창건하니, 영제부인의 법명을 따라 화엄 법류사 또는 불국사라 불렀다 하며, 1593년 임진란 때 좌병사가 무기를 지장전 벽 사이에 숨겼던 것을 왜병들이 발겨 예쁜 꽃속에 독벌레가 들어 있다 하여 여덟 명을 밟아 죽이고 절 전체를 불살라 남은 것은 석조물뿐입니다. 임진란 후 사오십 년이 지나 복구하기 시작 여러 스님들이 복구를 하였으나 미진하여 1970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발원으로 1973년 대 역사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답니다. 경내는 석단과 석교로 높여, 석단위는 부처님나라 불국토요, 아래는 범부세계를 나타내는데 누구든지 수도를 통해 불구세계에 이르기 위해 33계단을 가진 석교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사실을 상징한답니다.

 

탑의 유래

탑은 원래 인도의 스트우파란 말에서 나온 말인데 음을 따서 한자로 솔탑파라고 썼던 것이 줄어서 탑파 또는 탑이라 부른답니다. 옛 기록을 보면 탑은 인도에서,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 진리를 가르치신 곳, 돌아가신 곳에 세웠으나 그후 불교가 중국과 우리 나라로 전해지면서 불교도의 신앙의 표시가 되어 곳곳에 세워졌는데 탑에 부처님의 사리 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경 등을 모셔 부처님이 계신 신성한 것이라 여겨 다보탑을 다보여래 부처님과 석가탑을 석가 여래 부처님으로 봐야될 것입니다. 다보탑은 국보 20호로서 높이 10.4미터 석가탑은 국보21호로서 높이가 83m이며, 건립연대는 서기 756년 겅덕왕때 재상 김대성공이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삼국유사는 불국사를 크게 중축한 김대성의 전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답니다. 서라벌 모량리에 경조라는 가난한 여자가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하나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넓어 성과 같았으므로 대성이라 불렀다. 집이 가난하여 복안이라는 집에 일해주고 조그만 밭을 얻어 겨우 생활을 이었다. 어느 날 흥륜사 점괘라는 스님이 법회를 열기 위해 복안의 집에 보시를 청함으로, 배 50필을 주었다. 그랬더니 중은 한가지를 베풀면 만 가지를 얻을 것이고 안락하며 장수하리라 하였다. 집에 온 대성은 어머님께 점괘스님의 이야기를 하며 하나 시주하면 만 배를 얻는데 가난하여 보시를 아니하면 더욱 가난할 것이니, 머슴살아 받은 밭을 시주하여 뒤에 과보를 얻자 하니, 어머니도 승낙하여 점괘스님께 밭을 보시하였다. 그후 얼마안가 대성이 죽었다. 그 날밤 신라재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모량리에서 김대성 아이가 죽어 너의 집에 환생하리라 하여, 모량리에 확인하니, 대성의 죽음이 확실하였다. 그날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하여 아기를 낳았는데 왼손을 펴지 않다가 7일만에 펴는데 대성이란 글자가 새겨진 쇠붙이가 있었으므로 그대로 이름을 짓고,  모량리에서 전생의 어머니 경조도 데려다 같이 살게 하였다. 대성은 장성하녀 사냥을 나가 토함산에서 r5ha을 잡았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나타나 네가 왜 나를 죽이느냐, 너를 잡아먹겠다 하니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곰은 나를 위해 절을 세워 달라 하니 그후 대성은 사냥을 하지 않고 곰잡은 자리에 절을 세워 장수사라 하였고 마음에 감동이 켜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크게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새로 세워 신림과 표훈 스님을 그곳에 머무르게 하였다. 한 몸으로 두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한 대성은 착한 보시의 영험을 얻었으며, 경덕왕(서기751년)에 시작하여 혜공왕(서기774년)까지 다 못하고 12월 2일 대성이 죽자 국가에서 이 일을 완성시켜 유가스님으로 하여금 절에 머무르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합니다.

 

석가탑(무영탑)의 전설

불국사를 짓는데 석공이 많이 필요하였답니다. 특히 석가탑과 다보탑을 만들기 위해 멀리 백제 땅에서 아사달이라는 석공을 데려와 대역사를 시작하였으나, 백제 땅에 남은 아사녀는 사랑하는 남편이 달이 가고 세월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자 불국사로 보고픈 남편을 찾아 천리 길을 왔으나, 왕명으로 공사중인 절에, 잡인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 들어갈 수가 없어 문지기스님에게 사정을 하였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불쌍하게 생각한 스님이 잡생각을 없애고 남편 잘 되길 빌면은 저 밑에 있는 연못에 남편과 탐이 비칠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아사녀는 버선발로 쫓아가 보았으나 못속에는 흰 구름만 흘러갈 뿐이다. 몇날 며칠 연못을 바라보아도 탑과 남편의 얼굴은 보이지 않자 거의 실신상태의 아사녀는 남편을 부르며 못속으로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탑을 다 만든 아사달은 스님에게 아사녀의 이야기를 듣고 미친 듯이 못으로 뛰어 갔으나, 이미 죽고 만 후라 피눈물을 흘리며 애타게 불러보았으나 돌아올리 없었다. 아사달은 미친 듯 정으로 못가의 바위를 쪼아 아사녀의 모습을 새겼다. 그리고 아내의 뒤를 따라 못에 빠져 죽으니 후세 사람들은 두 사람이 죽은 못을 영지라 부르고 석가탑은 영원히 못에 비치지 아니했다고 무영탑이라 부릅니다.

 

석굴로

토함산은 해발 745m이며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는 8.2m로서 약 20리다. 이 도로의 꼬불꼬불하게 돌아가는 굽이는 아흔 아홉 굽이로서 약 20분이 소요되며 1972년 5월 6일 착공하여 1974년 2월 12일 개통되었고 총 공사비는 10억 3,600만원이 들었다.

 

석굴암

석굴암은 국보 제24호이며 지금으로부터 1220년 전 신라 35대 경덕왕 10년(서기751년) 불국사를 중창하신 재상 김대성 공이 전생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처음에는 석불사라 불렀고 이조 4년(서기1714년)에 석굴암이라 고쳐 불렀다. 이성계의 3대 정책의 하나인 배불 정책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잊어버림을 당하던 것이 1900년경 우편 배달부로 인해 다시 소개 중국의 대동운강 "석불", 인도의 "아잔타"석불과 더불어 동양3대 석불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예술을 자랑하는 것이 토함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암 석불임, 재상 김대성은 전생 부모를 위하고, 적을 부처님 힘으로 막기 위하여 토함산 정상에 신라의 꿈과, 이상, 정열을 한군데 집결시켜 만든 신라시대 걸작품이다.

 

안압지

여러분 우측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곳은 임해전, 안압지로서 30대 문무왕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지시고 국력을 과시하며 경사때 잔치를 베풀고 국빈을 영접하는 곳으로서, 연못을 파고 임해전을 만들었더니 기러기와 오리들이 많이 날아들었다. 하여 오리안 기러기압자를 써서 안압지라 불렀으며 신라 마지막 임금이셨던 56대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 국서를 썼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때 경순왕의 아들 태자 김충은 아바마마 어이하여 싸워보지도 않으시고 나라를 왕건에게 물려주나이까 끝까지 싸워 나라를 지킵시다 하였으나 경순왕은 이미 기울어진 국사를 지키기 위해 죄없는 백성의 피를 흘려 무엇하랴 하면서 항복하여 신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935년 이였으며, 태자 김충은 원통하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머리를 깎고 삼베옷을 걸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나무뿌리, 풀뿌리를 캐어먹고 살다 일생을 마치니 후세 사람들은 삼베옷을 걸친 태자라 하여 마의태자라 불렀다고 합니다.

 

첨성대

이제 오른쪽을 보시면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국보 31호인 첨성대죠. 첨성대는 신라 27대 선덕여왕(서기647년)때 축조된 것으로 지진 또는 별자리의 이동을 연구하고 길, 흉을 예언하였으며 높이 9.4m, 1단의 높이는 30㎝이며 모양을 보면 여자의 치마폭 같이 생겨 선덕여왕을 뜻하고 출입구 3단을 빼고 전체를 세어보면 27계단으로서 27대 선덕여왕의 연대를 표시하고 주춧돌과 윗단 2단과 27단을 합하면 30단으로서 1달은 30일을 표시하고 있으며, 주춧돌이 4면으로 된 것은 일년은 사시사철, 춘하추동을 표시하며 첨성대 돌 전체의 개수가 366개로서 1년을 표시하고 주춧돌 4개를 배면 362개로서 음력 1년을 표시하니 그 옛날 신라 사람들의 과학적인 연구에 머리가 수그러질 뿐입니다.

 

계림

이제 왼쪽을 보시면 숲이 우거진 곳에 기와집이 보이는군요. 저곳은 계림으로서 원래는 궁중에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고 불렸는데 신라 4대 석탈해왕 때 시림숲에서 때아닌 닭울음소리가 나서 이상하여 호공으로 하여금 가보게 하였다. 호공이 가보니 금빛 나는 작은 궤가 나무에 걸려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왕은 그 궤를 가져오라 하여 열어보니 어여쁜 옥동자가 있었다. 왕은 하늘이 주신 복이라 매우 기뻐하며 궁중에서 기르게 하니 자라며 점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름은 알지라 부르게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김씨라 하였으며, 시림을 계림이라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으니 이가 곧 경주 김씨의 시조이신 김알지공이시고, 그이 7대손인 미추가 신라 13대 왕이 되어 김씨로서는 첫 번째 임금이 되었답니다.

 

천마총

여러분은 이제 잠시후 도착되는 곳이 천마총입니다. 천마총은 사적 제175호이며 면적이 38,200평이고 신라 제 13대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이전의 다양한 고분이 밀집되어 고분 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특히 155호 고분에서 1973년 발굴 중 금관과 천마를 그린 장니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추왕릉은 앞서 계림에서 말씀드린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공의 7대 손으로서 신라 13대 왕이 되었으며 23년간 재위하시며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잘 지키신 분으로 일명 이름을 죽현릉이라고도 부른다. 그 이유는 미추왕이 돌아가시고 14대 유리왕때 이서국의 군사가 쳐들어와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 대나무 잎으로 장식한 군사가 나타나 적병을 무찌르고 사라진 후 미추왕릉앞에 대나무 잎이 산과 같이 쌓였으므로 미추왕의 혼령이 보내주신 병사라 하여 그후 이릉을 죽현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김유신의 묘

이제 여러분은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업적을 남기신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의 묘소에 참배하시게 되겠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서기 595년 충청도 땅 진천에서 태어나셨는데 대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 손으로서 아버지는 김서현 장군이시고 어머니는 망명부인으로서 어느 경진날밤 아버지의 꿈에 하늘에 별이, 어머니의 꿈에는 갑옷을 입은 옥동자가 뛰어드는 꿈을 꾸시고 잉태되어 20달만에 태어나시니 그가 김유신으로서 27대 선덕, 28대 진덕, 29대 무열, 30대 문무왕 4대에 걸쳐 임금을 섬기고 16세에 화랑이 되어 66세대 백제를 멸망시키고 74세에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하신 5년 후 79세로 세상을 떠나시니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춤을 추었다고 하며, 여러분이 찾으시는 송화산 옥류봉에 고이 잠드시니 13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참배 객이 찾는 답니다.

 

무열왕릉

잠시후 여러분이 도착되는 곳은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릉이 되겠습니다. 무열왕은 신라 29대 임금으로서 재위 8년에 걸쳐 김유신장군과 힘을 합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룩하신 대 영주랍니다. 이 능은 30대 문무왕이 둘레 90m, 높이 12m로 거대하게 만들었으며,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릉앞에 비석을 세우는 당의 제도를 본받은 최초의 예로 추측되고 있으며, 릉앞의 거북 비는 국보 25호로 지정이 되어 통일신라문화의 극치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백율사

신라 법흥왕 15년 이차돈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다. 법흥왕이 고구려 무호자의 설법에 감화되어 신라에 불교를 도입하여 백성들의 애국심과 겨레의 발전, 국토의 통일을 이루고자 신하들에게 왕의 뜻을 말했으나 모두 반대하고 이차돈 혼자지지 하였다. 신하들은 중이 이상한 옷을 입고 괴상하고 거짓스러워 불교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니, 이차돈이 왕에게 신하의 목을 치면 분명히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니 불교의 신령을 증거 하여 백성들이 불교를 믿도록 해달라고 간청하니, 왕은 애석하게 생각하며 목을 쳤다. 과연 그의 목을 베니 젖빛 같은 흰 피가 용솟음치며 목은 하늘을 날아 지금의 백율사터에 떨어지니 이곳에 절을 짓고 신하들과 백성들이 불교를 열심히 믿었으며, 정식으로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효불효교

신라 때 일곱 아들을 둔 과부가 있었는데 남천 건너 홀아비와 정을 통하여 밤이면 남천을 건너 애인과 지내다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들들이 눈치채고 추운 겨울에도 발을 걷고 냇물을 건너는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해 일곱 아들은 힘을 합하여 돌로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이승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효도, 죽은 아버지에게는 불효라 하여 효불효교라 불리게 되었다.

 

법주

경주 법주는 경주 최부자집의 잔칫날 빚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신라시대 사찰에서 국왕 일행이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절을 찾을 때 접대용으로 빚었으며, 불교의 불법승에 연유 법주라 불렀다. 토함산 계곡에서 솟아나는 물과, 오미자, 산수유, 구기자 등의 한약제를 넣어서 빚어 맛과 향이 뛰어나, 경주를 찾는 외국인과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신라의 3기

금자. 옥피리. 화주.

옥피리 : 신라 31대 신문왕이 동해에 나갔는데 30대 문무왕이 해룡이 되어서 대나무를 주어 그대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전쟁 때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가물 때 불면 비가 오고, 장마에 불면 비가 개이니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지금 박물관에 있는 두 개의 옥저중 큰 것이 신라시대의 만파식적이라 전해오며 신라가 멸망 후 고려 태조 왕건이 이 옥피리를 수도 개성으로 가져 갈려고 문경새재를 넘으니 소라가 나지 않아 신라 땅에서만 소리가 나는 신기한 것이라 하여 신라로 되돌려 보내왔다. 조선시대에도 옥저는 경주의 명물로 소중히 보관되어 왔는데 임진란 때 분실되어 이를 안타까이 여겨 새로 만든 것이 박물관의 작은 옥저이다. 그후 1692년 김승학이라는 사람이 땅을 파다 옥저를 발견하여 몰래 숨기고 있었는데 잘못하여 두동강으로 부러지고 말았다. 아깝게도 그것이 진짜 만파식적 이였다. 이 소문을 들은 당시 경주 부윤 이인징이 옛 보물을 찾아 밀로 때우고 은판으로 수리하여 먼저 만든 적은 옥저와 같이 나무상자에 넣어서 소중히 보관하였다. 이것이  지금 박물관의 옥저 만파식적이다.

금자 : 금자는 시조 박혁거세 왕이 천신으로부터 얻은 보물인데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살아난다는 신비한 자다. 이 소문이 중국에 퍼져 중국 황제가 빌려 달라하기에 잃어버릴까봐 지금의 건천 부근에 똑같은 무덤 30여 개를 만들어 그 어딘가에 묻어버렸다. 그후 그곳 마을을 금자가 묻힌 곳이라 하여 금척리라 부른다.

화주 : 화주는 분황사 탑에서 나온 것인데 빛깔이 수정같이 말고 고운 구슬이며, 화주에 광선을 통과시켜 솜을 비추면 불이 붙었다 하며 백율사에 보관하였다는데 지금은 있는곳을 알지 못하니 안타깝다.

 

여근곡 (건천읍 신천리)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렸고 미래를 예언, 잘 맞추는 임금이었다. 중국에서 사신이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가져와 바치니 그림을 본 여왕은, 꽃은 좋은데 향기가 없구나 하였다. 그후 씨를 심어 꽃이 피니 정말로 향기가 없어 신하가 어찌하여 그림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아뢰니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다 라고 하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영묘사 옥문지에서 때아닌 동지섣달에 3일간이나 흰 개구리가 울어 신하들이 여왕에게 아뢰었다. 여왕은 곧 알천장군을 시켜 서쪽 소산에 가면 적이 숨어 있으니 가서 무찔러라 하였다. 관연 그곳에 가니 백제의 우소장군이 부하 천여명을 거느리고 잠복해 있어 이들을 생포하였다. 나중에 그 뜻을 물으니 개구리 소리는 병란을 뜻하고, 흰색은 서쪽을 뜻하며,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뜻하니 서쪽에 여인의 음부 형사의 산세가 있어 그곳에 적이 숨어있기 마련이고, 남근이 여근속에 들어오면 음양철학상 패하기 마련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 전설에 나오는 여근곡은 지금의 소산이며, 경부고속 대구에서 경주쪽 건천 간이 정류장 못미처 오른쪽 산이며 여자의 음부와 비슷하다.

 

덕동댐

다목적 댐이며 보문 호수의 수량을 조절한다. 총 공사비 49억5천 만원이 들었으며, 길이 169m, 높이 50m 1975년 2월 3일 착공, 1977년 5월 31일 준공하였다.

 

기림사 (월성군 양북면 호암리)

불국사 다음으로 경주지역에서 큰 고찰이며, 석굴암과 문무대왕 수중 능과 삼각점을 이루는 곳이다. 천축국에서 온 스님이 창건하여 임정사라 불리다 서기 643년 선덕여왕 12년 원효 스님에 의해 크게 중창되어 기림사라 불렀다. 기림사란 석가모니의 기원정사에서 딴 것으로 김이란 기원정사의 숲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31본산의  하나이며 조선 25대 철종때 화재로 소실되어 즉시 경주 부윤 송정화의 중건으로 지금에 이르며, 왜구를 막기 위한 화랑들의 야전 사령부였다고도 한다. 절에 내려오는 나팔과 색외장군령이라고 쓰여진 목기가 당시의 것이라고 전하며, 이 절에는 오정수라는 우물이 유명하다. 특히 장군수를 마시면 힘이 용솟음 친다는데, 조선 어느 때인지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 발각되어 나라에서 샘을 메웠다고 한다. 경내에는 보물 415호인 건칠보살 좌상이 있다.

 

감은사지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는 30대 문무왕이 짓기 시작했으나 완성을 못보고 죽자 신라31대 신문왕이 부왕의 성덕을 기리기 위해 완성한 절이다. 문무왕은 재위한지 21년 만인 서기 681년 세상을 떠났는데 늘 말씀하시기를 나는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킬 것이니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동해바다에 주장해 줄 것을 부탁하여, 돌아가신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지금의 동해 대왕암에 안장하였다. 감은사는 금당에 용혈을 뚫어, 용으로 화신한 문무왕이 조수를 다라 종천을 거슬러 감은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금당 앞에는 국보 112호로 지정된 높이 13.4m의 쌍탑이 있는데 1959년 수리 할 때 서탑의 3층 탑신에서 값진 사리탑이 발견되어 경주 박물관에 보존하였다.

 

대왕암 (사적158호)

문무왕이 돌아가실 때 유언하시기를 내가 죽으면 땅에 묻지 말고 동해 바다에 수장해 주면 해룡이 되어 신라를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아 주겠다는 부왕의 뜻에 따라, 31대 신문왕은 지금의 양남 앞바다의 바위섬에 장례 지내니 세계에서 유래 없는 수중릉이 되었고, 바위섬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연못을 이루는 곳에, 길이 3m, 폭 2.2m의 거북등 같은 바위 속에 문무왕의 유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대왕암을 보려고 하면 미리 당국에 신청하여 허가를 받아야 된다고 합니다.

 

이견대 (사적159호)

대왕암이 보이는 언덕에 서있는 루이며, 신라의 유명한 보물 3기중의 하나인 옥피리 만파식적을 신문왕이 이곳에서, 문무왕이 죽어서 된 해룡과 김유신이 죽어서 된 천신으로부터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들었더니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비가 올 때 불면 비가 개이고, 질병이 있을 때 불면 질병이 사라진다는 만파식적인데 이 보물은 국립 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포항시

포항은 동해 제일의 항구도시로서 영일만과 형산강을 끼고 있으며, 군사산업, 교통의 요충지이다. 6·25때는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북괴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당시 육군 3사단과 학도병이 용감하게 싸웠던 고이기도 하며 한때 석유가 난다하여 온 국민들을 흥분시켰던 곳이기도 하다. 울릉도에 가는 배도 이곳에서 타며, 1955년 시로 승격되었다.

 

포항종합제철

이제 여러분은 국내에서 제일 큰 40m의 정문을 통과함으로써 생산량 세계 제1위, 시설규모 세계 10위의 포항종합제철의 중앙도로에 접어들었습니다. 포항제철은 1970년 4월 1일 착공하여 총 투자액 2조3천억 원을 들여 1981년 4기 종합 설비가 끝나 연 생산 910만 톤을 생산하며 직원수가 16,000여명에 부지가 271만평으로 여의도 광장의 24배 크기의 어마어마한 공장입니다. 정면에 철도가 보이는데요 공장내의 철도 길이만 67㎞에 달해, 포항에서 울산까지의 철도 길이이며 우측으로 보이는 설비 관리센타에서는 전, 공장의 이상유무를 자동으로 확인하는 곳입니다. 칸막이에 물이 흐르는 시설은 냉각 탑으로 뜨거워진 물을 식혀 재 사용하는 시설입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바다는 원료와 붉은 색의 원료가 보이는데, 검은 색은 유연탄으로서 용광로에서 철을 녹일 때 불을 때는 코크스의 원료이며, 붉은 색은 철광석으로서 용광로에 넣고 열을 가하여 녹이면서 불순물을 제거하면 순수한 철이 되는 원료이다. 유연탄은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수입하며, 철광석은 호주, 인도, 브라질 등에서 수입한다고 하고 연간 철광석의 소모량은 1,300만 톤으로 85%는 수입하며, 15%는 강원도 양양 등지의 철을 쓴다고 합니다. 오른쪽에 보시면 많은 콤베어 벨트가 보입니다. 포항제철 내의 콤베어벨트 전체 길이가 119㎞로서 약 300리에 달하며 원료 하역이나 또는 유연탄이나 철광석을 자동으로 각 공장으로 운반하는 시설입니다. 오른쪽을 보시면 코크스 공장입니다. 유연탄을 1,300℃로 가열하여 황산 및 불순물을 제거하고 주먹만하게 뭉치는 공장으로서 유연탄가루를 그냥 때면 열량이 적을 뿐 아니라 불이 잘 붙지 않기 때문에 코크스로 만들며, 나무를 구워 숯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종합제철의 상징인 용광로 또는 고로로서 윗부분에 철광석을 넣고 코크스로 불을 때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철을 얻는 시설이며, 용광로에 한번 물을 붙이면 6년에서 8년 동안 불을 끄지 않는다 고하며, 용광로 속의 끓는 쇳물은 온도가 2,500℃라고 합니다. 처음 보이는 것이 제 4용광로 연 생산 850만 톤, 다음이 제 3용광로 연 생산 550만 톤, 다음이 제 2용광로로 연 생산 260만 톤 마지막 시설이 맨 처음 만들어져 세계 속에 중공업국가로 첫발을 내민 제 1용광로 1973년 7월 3일 완공되어 연간 103만 톤을 생산합니다. 좌측을 보시면 하얀 칠을 한 큰 탱크를 보실 수가 있는데 저것은 가스탱크로서 철을 만드는 과정에서 불순가스가 나오면 모두 이곳으로 모아 연료로 재사용하며, 공해를 없애고 이 가스로 자체발전을 하여 하루 약 40만㎾의 전기를 생산하여 하루 전기소모량 80%를 자체 발전하고, 나머지 20%는 한전의 전기를 쓰는데 이공장의 에너지 소비량이 전국 소비량의 10%를 쓴다고 합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위쪽을 보시면 많은 파이프가 거미줄 같이 얽혀 있는데 노란 색의 큰 파이프는 불순 가스파이프이며, 나머지는 질소 및 산소파이프이고, 공장 내 파이프 길이가 1,500㎞로 약 4천리에 달하며 공장 내 굴뚝이 약 100여 개 있는데 보시면 굴뚝마다 연기가 하나도 안 납니다. 만일 100여 개 굴뚝이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다면 포항시는 공해로 살수가 없겠지요, 이제 왼쪽에 확트인 바닷가 영일만으로서 저 멀리 우리 나라 지도의 토끼꼬리 아닌 호랑이 꼬리 부분인 대보가 보이며, 바로 앞에는 제품 출하부두가 보입니다. 이곳에서 배에 실어 울산 현대중공업 등 국내는 물론, 생산량의 40%가 일본 및 동남아로 수출되어 외화획득을 하며, 보통제철공장을 건립하면 약 11년 가량은 적자를 보는데 포철은 설립 후 곧 흑자를 올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며, 오른쪽에 보이는 공장이 선재 및 후판 공장으로서 선재는 철사 만드는 공장이며, 후판은 두꺼운 철판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야적장에 보시면 두꺼운 철판이 보이는데 저것 한 개의 무게가 보통 10톤쯤 간다고 합니다. 왼쪽에 보이는 공장이 열연 공장으로서 뜨거운 후판을 이곳에 가져와 로라로 눌러 얇게 만들어 두루말이처럼 만드는 공장입니다. 여러분은 이 공장이나 또는 고속도로 같은데서 보면 대형 트레일러에 싣고 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 한 개의 무게가 보통 10톤 정도 나가는데 한 개의 값이 약 300만원정도이며, 냉장고나 자동차같이 더욱더 얇은 철판을 만드는 공장은 내연공장이라 부릅니다. 이것으로 포항종합제철의 이모저모를 관광하셨으며 우리도 하면 이와 같은 대 역사를 이룰 수 있으니 궁지를 갖고 열심히 노력하여 밝은 조국을 창조합시다.

 

오어사 (영일군 오천면 항상동)

운제산 오어사는 신라 26대 진평왕때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처음에는 항사사로 불렸으나 오어사라 부르게 된 연유는 삼국유사에서 이렇게 전한다. 선덕여왕때 혜공이라는 스님이 이 절에 기거를 하였는데 술마시고 길에서 춤을 추고 삼태기를 쓰고 다녀 삼태기 중이라 불렀다. 어느 날 이 고장 선비들이 이 절 앞 개천가에서 고기를 잡고 놀고 있는데 삼태기 중이 다가오더니 잡아놓은 고기를 몽땅 먹어버리는 것이었다. 화가 난 사람들이 욕을 하며 구타하자 스님은 태연히 물에 대어 뒤를 보는지라 의아해서 지켜보니 물고기들이 줄줄이 살아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모두 대경실색하여 사죄하였고, 이때부터 모두 나의 물고기인 절이라는 뜻으로 항사사를 오어사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고, 혜공스님과 원효대사는 아주 친하였는데 농담도 곧잘 하였다. 어느 날 두 스님이 냇가에 나와 물고기도 잡아먹고 새우도 잡아먹어 같이 변을 보고는 서로 "네똥은 내 고기다"라고 놀려대어 오어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이야기도 있으며, 원효스님의 삿갓을 보관하고 있다.

 

애보장기갑등대 박물관 (영일군 대보면)

우리 나라 호랑이 꼬리부분인 대보 장기갑등대에서, 국내 최초로 등대에 관한 자료 및 시설물을 전시하고 박물관을 세웠다. 1983년 8월 29일 착공하여 1985년 2월 7일 개관하였으며 공사비 2억 6천만 원을 들였고 710점이 전시되어있다. 옆의 장기갑등대는 우리 나라에서 3번째 세워진 등대로서 1903년 12월에 첫 불을 밝혀 영일만의 안전한 길잡이가 되어 약 30㎞의 밤 뱃길을 밝힌다. 일 나라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등대는 1903년 3월 3일 인천 소월미도에 세워졌으며, 두 번째는 1903년 6월 팔미도에 세워졌고 우리 나라에는 등대가 유인등대 48개, 무인등대 750개 모두 798개이며 배의 안전항해와 길잡이가 되기 위해 외로운 곳이나 고독한 섬에서 파도와 갈매기를 벗삼는 등대지기는 약 200명이 근무하고 있다고 합니다.

 

 

울릉도                                                                                            관광지 미리보기 ☞클릭!

 

우산국 또는 우릉 또는 삼봉이라 불리던 이 섬은 서기 512년 신라 이사부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거지가 없고, 도둑이 없으며 뱀이 없어 3무, 바람과 향나무 그리고 미인과 묵과 돌이 많아 오다로도 불린다. 육지와 제일 가까운 강원도 임원과 137㎞ 떨어져 있고, 포항과는 217㎞ 떨어져 있으며 총면적 7,286㏊ 해안선 길이 45㎞, 인구 약 19,000명이 삭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문 해양성 기후로서 연평균 기온이 12℃, 비오는 날, 눈오는 날, 흐린 날이 많아 맑은 날은 연평균 50일 정도이며, 강수량이 연평균 1,485㎜로 전국 제일이며 눈이 많아 적설량 또한 전국에서 제일 많다. 주민들의 50%가 어업에 종사하여 연간 약 7,000톤의 수산물을 생산하는데 그중 97%정도가 오징어이다. 오징어잡이 한창때인 9월과 10월에는 오징어잡이 배들이 몰려들어 집어등을 켠 배들로 불야성을 이루며, 지금부터 약 100년 전이 S1882년 울릉도 개척령이 내렸을 당시 이곳의 인구는 겨우 116명이었다고 한다. 1977년 한일 고속여객선 취항후 많은 관광객들이 태고적 순수함과 이국적인 정취를 보기 위해 울릉도를 찾으며 이 섬에는 해발 984m의 성인봉과 도동항의 2천년 묵은 향나무를 비롯하여 통구미의 사자암, 죽암, 관음굴 등의 많는 절경과 575종의 식물, 344종의 곤충 그리고 54종의 조류 등이 서식하며, 92㎞ 떨어진 망망대해에는 독도가 외롭게 떠있습니다.

 

보경사 (영일군 송라면 중산리)

해발 930m의 내연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이 사찰은 서역불교가 중국에 전해질 때 마등과 법란 두 스님이 불경과 불상 그리고 십이면경과 팔면경을 가지고 중국에 와서 십이면경은 중국 종남산에 묻고, 백마에 싣고 왔다 하여 백마사라는 절을 세우고 팔면경은 그의 제자 일조 스님에게 주어 동쪽나라 신라국 종남산 아래 깊은 못이 있으니  그 못이 명당자리라 팔면경을 묻고 절을 세우면 만세 천추에 빛날 것이다 하여 신라로 떠날 때 마침 중국에 유학 왔던 지명법사를 만나 불법과 팔면경을 주었다. 지명법사는 신라로 돌아와 동해안 폭포의 왕국 지금의 내연산 아래, 연못에 팔면경을 묻고 절을 세우니 보배 거울을 묻었다 하여 보경사라 불렀다.

 

백암온천

해발 1,004m의 백암산 기슭에 있는 백암온천은 수온이 45℃로서 유황 및 라듐 성분으로서 피부명과 위장병 관절염 등에 특효하며 신라시대 백암스님이 발견했다는 말도 있다. 약 700년 전 정양일 이라는 사냥꾼이 백암산에서 노루를 쫓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고 산기슭 한 오두막집에 들어갔는데 이 집 이쁜이라는 처녀가 산 계곡에서 떠온 따뜻한 물로 씻고 마시게 하였더니 금방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월송정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관동 팔경중 가장 남쪽에 있으며, 고려대 창건되었고 고려 중엽 이 곳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진 것을 1969년 제일동포의 지원을 받아 중건하였으나 콘크리트 건물이라 옛모습을 찾을 수 없어 해체하고 1980년 7월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하며, 월송정이란 처음 신라시대 영랑, 순랑, 인랑, 남랑 등의 화랑이 말을 타고 해변의 절경을 모르고 지나갔다 하여 넘을 월자를 써서 월송정이라 불렀으나 그후 월야에 청청한 송영이라, 달월자를 써 월송정이라 불렀다. 선조 임금은 이곳 그림을 보고 크게 칭찬한 바 있고 조선 숙종 임금은 친히 정자를 두루 살펴보았다 합니다.

 

망양정 (울진군 근남녀 산포리)

규모가 적은 정자인데 해안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남쪽 기성면 현종산에 서 있었는데 서기 1858년 조선 철종 때 울진 현령 이희호가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현재 걸려있는 관동 제일루는 숙종 임금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성류굴

천연 기념물 155호로 지정되었으며 2억 5천만년 전에 생성되었고 석순, 석주, 석탑 등이 어울려 아름다운 석회석 동굴이다. 굴 앞에 흐르는 물은 왕피천으로 맑고 경치가 좋아 신선들이 노는 장소라 하여 선류 굴이라고도 불렀으며, 임진왜란 때 이 부근의 백성 500여명이 그 굴에 피난하였는데 왜군이 알고 굴을 막아 모두 몰살하였다는 슬픈 이야기도 있다. 또한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때는 원호대사가 이곳에 천량암을 짓고 수도하였고,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가 이 굴속에서 수도하여 진리를 득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울진 현동 (36번 도로)

경북 울진군과 봉화군 현동을 연결하는 이 도로는 1981년 11월 착공하여 1984년 10월23일 공사비 2백 53억 원을 들여 준공하였고 65.8㎞를 54,5㎞로 단축시켜 울진 영주간 4시간 30분 소요되던 것을 3시간으로 1시간 30분 단축되었으며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영계곡을 다치지 않고 태백산맥을 넘는 난공사로 국내 민간기업이 기피하여 육군2150부대와 8개 공병대가 연인원 50만 명과 시멘트 59만 5천 포 철근 2천 3백 톤을 들여 완고하였고 포장은 극동, 미륭, 롯데, 금오건설이 맡아 준공되었다.

 

36번 도로 준공 기념 탑

아름다운 불영계곡 입구에 경북개발관광이 시공한 휴게소 도로 건너편에 이 도로를 만들다가 돌아가신 국군 장병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공사비 3억 원을 들여 예술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장병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이 도로를 지나실 때 그분들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불영사 (울진군 서면 하원리)

신라 진덕여왕 5년(서기651년) 의상대사가 이곳 해운봉에 올라 산세를 살핀 지 인도의 천축산 같아 천축산으로 칭하고 사찰을 지으려고 하니 이곳 연못에 9마리의 용이 독기를 품고있어, 불법으로 절을 세우겠다고 하니 순순히 응하지 않아 도술로 불화자를 써서 연못에 던지니 물이 끓어올라 용들이 견디지 못해 산을 뚫어 도망을 치니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절 오른쪽 산에 이상한 바위가 해가 질 때면 그림자가 절 마당 연못에 비치면 부처님의 형상이 나타나니 부처불에 비칠 영자로 써서 불영사로 불렀으며 지금도 절 뒤 오솔길을 돌아가면 용이 산을 뚫어 도망한 곳에 구룡폭포가 있으며 그때 흘린 피자국이 바위를 붉은 색으로 변하게 하였다고 한다.

 

불영사의 이적

조선 숙종때 왕비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임금은 후궁을 총애하고, 후궁은 왕비를 헐뜯고 모함하니 드디어는 궁에서 쫓겨나, 괴로움에 자살하려고 하였더니, 그날 밤 꿈에 한 중이 나타나 소승은 불영사의 중이온데 내일이면 좋을 일이 있을 것이니 하루만 참어라 하였다. 과연 날이 새어 후궁의 음모가 모두 밝혀져 처벌을 받고, 왕비는 환궁하게 되어, 고마움에 불영사 사방 10리의 땅을 하사 하셨다. 지금도 절 주위의 많은 부동산이 불영사 소유로 되어있다.

 

울진 원자력 발전소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 위치 총 부지 112만평에 1981년 1월 착공하여 1988년 9월 준공예정이며 총 공사비 2조 4천 404억 원으로 이공사가 완공되면 연간 125억㎾의 전력을 생산하여 석유를 연간1,600만 배럴 절약하여, 하루 우리 돈 약 15억 원을 절약하게 되며 하루 190만㎾의 전기를 생산하게 되니 안동댐 수력발전이 9만㎾로 안동댐 수력발전소 약 20개와 같은 발전량이라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덕구온천 (울진군 북면 덕구리)

경북 울진군 북면 덕구리에 위치 성분은 알칼리성으로 수온 40℃ 위장병과 류마치스 관절염에 특효하며 우리 나라 유일의 노천 온천으로, 버스 종점에서 응봉산 오솔길을 약 4㎞를 걸어가야만 되며 지금은 파이프로 버스종점까지 온천물을 당겨 산을 오르지 않아도 온천을 즐길 수 있다.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사냥꾼이 노루를 쫓다가 발견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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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