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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광역시

 

부산

우리 나라 제1의 항구 도시이며 6·25때는 임시 수도였고, 부산포의 조그만 갯마을이 임진란 후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됨에 따라 외교 전초기지와 국방의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부산항이 개항되고,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1925년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되어 크게 팽창되었으며, 1963년 직할시로 승격 나날이 발전되어 가는 우리 나라 제2의 도시이다. 부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부산을 둘러싸고 있는 산 모양이 가마솥 같아 가마솥 부자를 써서 부산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범어사 (동래구 청룡동)

금정선(해발801m) 범어사는 신라 30대 문무왕 18년(서기678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하며, 범어사의 유래는 10만 병선을 거느린 왜구의 침입이 잦아 근심을 하고 있을 때, 왕 앞에 한 성인이 나타나 금정산 숲속 50척 거암이 있는 곳에 샘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면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계시를 하여, 임금은 의상대사를 불러서 금정산으로 보내니 금정산정에 50척의 바위 가운데 샘이 있고, 그 물 속에 범천의 고기가 놀아 그곳에 절을 짓고, 산 이름을 금정산, 절 이름을 범어사라 불렀다 한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가 이곳을 승병사령부로 정하고 의병들을 모아 왜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임진란 때 많은 전가들이 모두 소실되어 선조 임금 때(서기 1602년) 중건되었으나 화재로 인해 불에 탄 것을 조선 15대 광해군 5년(서기 1613년)에 중건, 오늘에 이르며, 경내에는 보물 434호인 대웅전과, 보불 250호인 3층석탑이 있으며, 천연기념물 176호인 등나무 준생지가 절 주위에 있다.

 

도시 고속도로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서면까지 종전 1시간여 걸리던 것을 20분내에 달릴 수 있도록 하고 도심 교통체증을 해소시켜 주는 이 도로는 공사비 약 560억을 들여 1977년 착공하여 1980년 10월 7일 개통되었다. 총 길이 22.5㎞이며, 오륜터널 410m, 수영터널 460m, 광안터널 1,130m, 대연터널 280m, 문현터널 445m의 5개 터널이 있으며, 유사시의 방공호로 터널 내에서도 방송 청취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부산항

기록에 의하면 서기 1407년 조선 태종 임금 때, 왜구들이 약탈, 방화, 살인 등을 일삼으니,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해 왜선을 정박하기 위한 첫 개항을 하였으나, 본격적인 개항은 강화도 조약이 맺어지고 강제로 1877년 개항되었다.

 

제1부두

여객 부두이며 부관페리호 전용 부두이다.

1905년 한일 의정서 작성후,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끼 항로를 일기환과 대마환을 취하시켜 부관 연락선을 개설, 일제 36년간의 숱한 이별과 만남의 애환을 만들어 냈으나. 해방 후 뱃길이 폐쇄되었다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한·일 합작으로 부관페리호가 다시 운항되었고, 일본 국기를 달고 운행하였다. 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한 경기도 용인 출신 제일동포 박종씨가 자금을 투자하여 우리 나라 태극기를 꽂은 최초의 페리호가 1983년 4월 27일 18시 이곳 부두를 떠나 시모노세키로 향하게 되었다. 페리호는 길이가 127m, 높이 22m, 5,763톤 109대의 승용차와 566명이 승선할 수 있습니다.

 

제3부두

군인 전용부두로서 월남전으로 떠나는 파월 용사들이, 이곳 부두를 떠나 갈 때 사랑하는 애인과 남편을 보내며 잘 사우고 몸 건강히 돌아오라며 이별의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려, 눈물 바다를 이루었던 곳이나, 어느덧 세월이 20여 년이 흘러 그대 떠나는 용사들이나 보내는 이들도 중년이 되어 옛날을 회상하리라.

 

제2, 4부두

곡물과 원목, 석탄 원유 등을 수입과 수출하는 부두.

제5부두

콘테이너 전용부두

세계 화물 수송의 규격화와, 안전과 신속한 수송을 위하여, 국제적으로 콘테이너 시스템에 의한 수송방법이 개발되어, 부산항도 전용부두를 설치, 최신 기계설비로 우리 나라의 수출품 TV, 신발, 섬유류 등을 콘테이너 박스에 넣어 수출하고 외국의 물건도 수입하여 대형 트레일러에 실어, 전국 현지에 수송하게 하는 부두이다.

 

용두산 공원

옛날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송현산이라 불렸으나, 임진란 후 이곳 산모형이 용이 바다를 바라보면 일본을 삼킬 듯 하다 하여 용두산이라 불렸으며, 1957년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으로 불리다, 4·19이후에 다시 용두산공원으로 바꾸었다. 용두산 정상에 1974년 높이 120m의 부산탑을 세워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면, 부산항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과학전시관, 해양수족관 등의 부대 시설로 부산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공원 내에는 대원군의 척화비와 이순신 장군 동상 등이 있다.

 

연안부두

제주도를 가는 페리호와 충무 여수로 가는 엔젤호, 그밖에 도서지방을 운행하는 국내 여객선의 부두

 

영도다리

1932년 2월 착공하여 1934년 11월 23일 준공되었으며, 길이 214m, 폭이 18m, 통과 하중 25톤이었고, 본토와 영도섬을 연결하는 우리 나라 최초의 섬과 연결되는 다리였다. 선박 왕래의 위험이 있다고 반대하는 해운업자들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31m의 다리를 하루에 두 번씩 들어 천톤 이상의 대형 선박도 통과 할 수 있도록 하여 부산의 명물이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다라 부산에 차량이 늘어, 다리를 들 때마다 차량이 1㎞애상 밀려 1966년 9월 1일 다리를 고정시켜 다시는 영도다리를 들어올리는 구경을 할 수가 없어 아쉬움만 남는다.

 

영도대교

구 영도다리가 교통소통의 한계점으로 말미암아 1976년 부산항 개항 100주년 기념 행사로 착공하여, 1980년 1월 30일 준공되어 길이 260m, 폭이 20m, 높이 31m, 통과하중 54톤, 철강이 3,265톤이 들어 총 공사비 79억 원이 소요되었다.

 

영도

신라, 고려 때는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여 지방 호족들의 반 독립적 자치지역으로 있을 때, 영도 섬은 말을 키우는 목마장이었다.

이곳의 말 중에 천하 명마가 많이 나와, 절영도라 부른 것이 영도가 되었다.

 

오륙도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는 부산항 입구에 솟은 작은 섬으로서 밭섬, 굴섬, 송곳섬, 수리섬, 방패섬, 다섯 개의 섬이나 그중 방패섬이 브이자 형안에 물이 들어오면 두 개로 나뉘어지고, 물이 빠지면 1개의 섬이 되어 물이 들어오면 6개 섬, 나가면 5개 섬이 되어 오륙도라 한다. 일명 등대섬이라 불리는 밭섬에는 1907년 세워진 등대가 22만 촉광으로 약 30㎞의 항로를 비춰주어, 부산항을 찾는 많은 배들의 길잡이가 된다.

 

한국 해양 대학

방파제로 연결된 아치섬에 위치한 우리 나라 유일 의 4년제 해양 대학으로 이곳을 졸업하면, 1등 항해사 및 1등 기관사가 되어 오대양을 누비며, 국위 선양을 하는 마도로스가 된다. 1946년 개교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진해, 인천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1970년 현자리로 이전하였다.

 

태종대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이 3국을 통일하시고 전국 명승지를 다니시다 이곳 영도 섬의 멋진 경치에 취해 쉬어갔다고, 태종대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영도시민의 새마을 자금과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이룩된 순화 도로를 따라 약 2㎞ 쯤 가면 백길 절벽 위에 모녀상이 있는 전망대가 있다. 날이 맑게 개인 날에는 현해탄 넘어 멀리 대마도가 보이며, 옛날에는 이곳에서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절벽아래 바닷물에 투신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 일명 자살바위라 불렀는데, 모녀상을 세우고 난 뒤부터는 자살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낙동강 하구언과 을숙도

낙동강 하류는 바닷물과 강물이 교차되는 지점으로 수많은 삼각주가 형성되어 갈대밭이 무성하니 새들의 천연적인 안식처가 되어 사철 수많은 철새가 찾아와 갈대 숲에 노는 장관을 볼 수 있어,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데, 공사비 1천 8백 95억 원이 투입되어 1983년 4월 23일 기공하여 1987년 완공을 보게 될, 길이 2천 400m, 높이 6m의 하구언이 완공되면 부산의 급수와 창원, 김해 등의 공업용수 및 농업용수가 해결되어 연간 약 만 톤의 식량 생산효과가 있지만, 자연 생태계가 많이 파괴되고 숲이 없어지는, 철새 도래지 에는 벌써부터 철새의 종류와 수가 줄어드니 안타까울 뿐이다.

 

어린이 대공원

이곳은 원래는 부산시민의 급수를 목적으로 호수를 개발하여 수원지로 쓰였으나 1972년부터 공원으로 개발, 1974년 9월 7일 공사비 6억 1천 4백만 원을 들여 어린이 회관을 준공, 어린이의 정서교육과 자연, 과학 등의 견학으로 산 교육장이 되었고, 육영수여사의 마지막 친필인 "웃고 뛰놀자. 그리고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밝은 내일의 꿈을 키우자"라는 비가 있다.

 

금강공원

산정에 높이 약 6m나 되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둘레가 3m, 깊이 30㎝ 정도 되는 샘이 항상 물이 차있으며, 그 물이 황금색 같다 하여 금정산이라 부르고, 이 일대 기암괴석들이 금강산과 같다 하여 금강공원이라 부르며, 금정 산정으로 오르는 1,260m 길이의 케이블카와 동물원, 식물원 및 각종 오락시설들을 갖추어, 동래온천과 더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공원 입구에는 1742년 영조 임금 때 동래부사 김석일이 세웠다는 망미루와 동래 4대문의 개폐와 정오를 알리는 큰북이 루 위에 달려있다.

 

동래온천

이 온천은 예로부터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본격적으로 온천 구실을 한 것은 서기1691년 숙종 임금 때 동래부사 강필리가 맥을 찾아 온천을 개발, 욕사를 지었으며,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번창되었고, 알칼리성 식염 온천이며 수온은 55℃, 위장병, 기관지염, 부인병에 특효하며 1765년 영조 때 세워진 온정 개건비는 탕에 들어가 목욕하면 모든 질병을 고친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구덕터널

우리 나라에서 제일 긴 터널로서, 길이가 1,870m, 동아건설에 의하여 공사비 290억 원으로 완성되었다.

 

충열사

안락동 로터리에 있으며 임진란 때 왜적과 싸워 장열하게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 첨사 정발, 다대포진 첨사 윤홍신, 동래 9의사 및 많은 순국 선열들을 모신 사당이다. 1606년 선조 39년 읍성 남문 안에 소공사를 건립하여 1652년 현 위치로 옮겼으며, 1972년 박정희 대통령께서 충열사 휘호를 내리시고, 1978년 7월 21일 정화사업 준공, 매년 음력 2월 8일 제사를 모신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은 소서행장을 1진으로 부산성과 동래성을 치니 임진왜란이 시작되어 부산진 첨사 정발장군은 끝가지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패하고 왜군은 물밀 듯이 동래성으로 쳐들어와, 송상현 부사에게 길을 비커라고 하니 송부사는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성민 들과 용감하게 사우다 순절하였다.

 

보발과 파발

선조 임금은 급한 공문서를 띄울 때 보발과 파발이라는 제도를 두었는데, 임진란이 1592년 4월13일 일어나자 부산 좌수사 박홍이 임금님께 띄운 장계를 가진 파발이, 4월 17일 아침에 한양에 도착하니 5일 걸렸다. 천리 길을 하루 2백기 뛴 것이다. 그러나 보부상이 연락하는 사발 통문은 하루낮, 하룻밤 24시간이면 지름길로 뛰어 부산 한양을 연락하였다 한다.

 

해운대

예로부터 조선 팔경의 하나인 해운대는 울창한 송림, 깨끗한 모래사장, 맑은 바닷물로 우리 나라 최고의 해수욕장이며, 신라의 석학 최치원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가던 중 이곳의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동백섬의 넓은 바위에 그의 호인 해운을 따서 해운대라 새긴 대서 유래되었으며 1974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부산시에서 동백섬에 인어상을 세웠으며 동백섬 정상에는 최치원 선생의 동상과 유적비가 있다.

 

해운대 온천

언제 발견된 것인지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바닷가 모래사장에 김이 무럭무럭 나고 눈이 와도 곧 녹아버려 이 부근 사람들에 의해 개발되었으나, 근대적인 온천 시설이 이루어진 것은 1905년대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하며, 단순 온천으로서 염분이 많이 함유되어 피부병, 위장병 등에 특효하며 특히, 머리 비듬이 많은 사람에게 좋다고 한다.

 

유엔묘지

6·25당시 우리 나라를 도와 유엔 16개국 장병 전몰 용사 2,200여기의 유해가 고이 잠들어 계시어 정부는 자유 평화를 위해 이 땅에서 싸우다 돌아가신 평화의 사도들을 위해 1951년 1월 세계 최초로 유엔 묘지를 설정하고, 2,274기의 유해가 잠들어있는 이 묘역을 영구히 유엔에 기증하여 많은 사람들을 참배하게 하였으며 그분들의 영혼을 위로하였습니다.

 

동명불원

동남아 스타일의 거대한 이 사찰은 전 동명목재 사장인 강석진씨가 많은 돈을 들여 1967년 착공하여 1977년 완공한 사찰로 부지 2,200평에 대웅전(높이 18m) 건물 및 여러 도의 건물이 있다.

 

김해

김해는 옛 가락국의 도읍지인데, 서기523년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491년간 고대 문화를 꽃피웠으며, 1931년 11월 1일 읍이 되었다가 1981년 4월 13일 시로 승격되었으며 영남제일의 곡창지대인 김해평야와, 특수작물로 유명하다. 관광지로는 김해 국제공항,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 능과 그이 왕비 능이 있다.

 

김수로 왕릉 (김해시 회현동)

김해 김씨의  시조이며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은 서기 42년 3월 3일 이곳 구지봉에서 태어났다. 옛날 이곳 김해 땅에는 9촌장들이 부족을 다스렸는데, 하루는 4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가보니 옥황상제가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릴 대왕을 보내니 너희들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하고 춤을 추며 노래하면 대왕을 환영하는 것이니라 하니 그 말을 듣고 노래하며 춤을 추니, 하늘에서 금합이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촌장들이 신기하여 금합을 열어보니 금빛 나는 알이 6개가 있어 소중히 모셔다 예를 지내고 다시 열어 보니 알이 깨어져 15세 정도 되는 사내아이 6명이 나왔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사람으로 나온 사람을 추대하여 임금으로 모시고,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씨로 여섯 알에서 먼저 태어났다 하여 수로라 이름지으니 가야국의 시조 임금 이였고, 나머지 다섯 분은 각각 5가야의 왕으로 추대되었으며, 수로왕은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과 결혼하여 10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두 명은 모성 허씨를 다르게 하여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백성을 잘 다스리고 영토를 확장한 임금은 왕위에 오른 지 158년 만인 서기 199년 에 돌아가시니 그의 능을 지금의 김해시 회현동에 썼다.

 

밀양

밀양군은 삼한시대의 변한 땅으로 가야국에 속해 있다가 서기 532년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하여 추하군이 되었다. 그후 밀주군, 밀성군으로 불리다가 고려 공양왕대 밀양부로, 1894년 고종 임금 때 밀양군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낙동강의 지류인 남천강이 남북으로 흘러 기름진 평야가 이어지며 특수작물과 많은 관광지가 있습니다.

(4대 기적은)

1.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사명당 비석.

2.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나타나는 태극 나비.

3. 한 거울에 눈 속에서도 죽순이 솟아나는 무봉암 대밭.

4. 한 여름에 얼음이 나는 산내면 얼음골.

또한, 우리 나라 3대 누각인 영남루

(3대누각)

1. 밀양 영남루

2. 진주 촉석루

3. 평양 부벽루

그리고 우리 나라 삼한시대 만들어진 3대 저수지

1. 밀양 수산제

2. 제천 의림지

3. 김제 벽골제

등이 유명하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큰공을 세웠던 승병장 사명당 스님의 고향이기도 하다.

 

영남루

우리 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인 영남루는 보물 147호로 지정되었으며, 신라 법흥왕때 창건한 영남사 터의 종각인 금벽루를, 고려 공민왕 때 군수 김진이 중수하고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불렀다. 남천강 절벽에 날아갈 듯이 우뚝 서 있는 루는 너무나 경치가 좋아 조선 16경의 하나로 손꼽혀왔다.

 

아랑각

약 400년 전 조선 명종 때 밀양 부사에게는 무남 독녀 아랑이 있었다.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나 많은 양반들 집에서 청혼이 들어와, 아랑과 대조될 훌륭한 신랑감을 고르던 중이었는데, 부사 집에 침모를 양모로 정한 관노 주기라는 사람이 아랑의 아름다움에 반해 짝사랑을 하게되었다. 신분의 차이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몸부림치며, 양모인 침모에게 부탁하여한 번만이라도 가까이 보았으면 죽어도 원이 없으니 소원을 풀어달라고 졸랐다. 어느 달 밝은 날, 침모가 아랑에게 영남루에 달구경 가자고 하여 영남루에 오르니, 미리 관노와 꾸민 대로 침모가 살짝 피해 버리고 관노가 나타나, 아랑의 손목을 잡고 아랑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욕을 보이려 달려들었다. 아랑이 죽을힘을 다해 반항하니 이미 죽을죄를 지은 관노는 돌려보낼 수도 없어 설해하여 엉남루 아래 대밭에 시체를 묻어 감추어 버렸다. 침모와 관노만 이 사실을 알 뿐 아무도 모르니 귀엽게 키운 외딸을 아무리 찾아도 못 찾는 부사는 슬픔에 젖어 벼슬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그후 여러 차례 밀양부사가 부임하였건만 모두가 부임한 그 다음날 죽어 시체로 발견되는 괴이한 일이 연속되니, 모두가 밀양부사를 꺼려 부임해 오려는 원님이 없어 공석인 채 몇 해가 되었다. 담이 크고 지혜가 있는 이상사라는 사람이 과거 급제하여 밀양부사를 자원하여 이곳에 내려와 첫날밤을 지내는데 자정이 되자 찬바람이 획 불더니 촛불이 꺼지고 붉은 피투성이 옷에 머리를 산발한 처녀가 무서운 귀신으로 나타나서 부사에게 절을 하니 담력이 큰 부사는 네가 무엇이기에 이런 못된 짓을 하느냐 하며 크게 꾸짖으니, 귀신이 말하기를 소녀는 전임부사의 딸 아랑이온데 철천의 한을 풀지 못하여 부임해 오는 부사에게 나타나 하소연하려고 하면 제 모습을 보고 놀라 세상을 떠나시어 그 죄 사과할 길 없사오나, 이제 영특한 원님이 오셨으니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주시옵소서 한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원님이 대체 누가 너를 죽인 놈이냐 한즉, 내일 관속이 모두 모이면 제가 흰 나비가 되어 그놈의 머리 위에 앉을 터이니, 그놈을 잡아 문초하시길 바랍니다. 약속을 하고 사라졌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전 관속을 모이게 하니 과연 흰나비 한 마리가 어느 관노의 머리에 앉아있다. 사또 추상같은 명을 내려 그놈을 잡아 형틀에 묶어 문초하니 침모와 공모하여 죽여 대밭에 시체를 묻었다는 자백을 받아 관노와 침모를 목베이고 대밭에서 시체를 찾아내어 후히 장례를 지낸 후 아랑각을 세워 아랑의 정절을 크게 찬양하고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니, 그날 밤에 다시 아랑이 나타나 사또께 백배 치하하고 간 뒤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지금도 아랑이 죽은 음력 4월 16일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대숲 속에는 아랑의 시체를 발견한 자리를 표시하는 아랑유지라 쓴 비석이 남아있다.

 

사명당 비 (밀양군 무안면 무안리)

일명 땀흘리는 비석으로 무안면 무안지서 옆에 있다. 미 표충비는 경북 경산에서 돌을 가져와 높이 4m, 폭 96㎝, 두께 54.4㎝로서 서기 1742년 조선 영조 임금 때 세워졌으며, 이상하게도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땀을 흘린다.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동란 7일 전에 3말 1되를 흘렸으며, 그 외에도 기미독립운동, 8·15해방, 6·25동란, 4·19학생의거, 5·16혁명에 땀을 흘렸으며, 그 중에서도 기미 독립때 제일 많이 흘려 5말 7되를 흘렸다 하며 육영수여사가 돌아가신 날도 땀을 흘렸다 한다. 비석이 땀을 흘릴 때는 사람같이 앞 머리부분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뺨위를 주르륵 흐르듯 글귀 사이를 타고 흘러내린다 하며, 땀의 양을 측정하는 것은 비석이 땀을 흘릴 때 명주수건을 밑바닥에 갈았다가 주어 짜 측정한다고 한다.

 

얼음골 (밀양군 산내면 남명리)

천연 기념물 제 224호인 얼음골은 해발 1,189m의 천황산 기슭 일대 해발 600∼700m의 지점인데 5월에서 9월까지 얼음이 얼고,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녹는 기이한 현상으로서 밀양 4대 기적의 하나이다. 더울수록 얼음이 더 얼고, 얼음골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에는 맨발로는 들어갈 수없을 정도로 물이 차가워 한여름 피서지로 많은 사람이 찾아든다.

 

표충사 (밀양군 단장면 구천리)

해발 1,122m의 재약산에 둘러 쌓인 표충사는 신라 28대 진덕여왕(654년)때 원효대사가 창건 죽림사라 하였고, 그후(서기829년) 신라 41대 흥덕왕때 안도의 고승 황면선사가 중창을 할 때 마침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전국영산 약수를 찾아 헤매다가 이곳 죽림사에 약수를 마시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병이 나은지라 흥덕왕은 크게 기뻐하며 국고로 대가람을 중창하고 왕자가 마신 약수 이름을 영정 약수로, 절 이름을 영정사로 개명하고 뒷산을 재약산으로 불렀다. 고려대는 삼국유사를 지으신 일연선사가 주석 하면서, 천여대중을 제법 하여 불법을 크게 중흥하니 충렬왕은 동방 제일 선찰이라 칙액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크게 공을 세우신 서산, 사명, 기허 3대 스님의 충절을 표시코자 조선 18대 현종 임금이 표충사라는 사액을 내려, 그때부터 표충사로 불렸다 하며, 경내에는 국보 75호인 청동향완 보물 467호인 삼층석탑과 사명대사의 가사, 장삼, 바루 등 339점이나 되는 많은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

 

마금산 온천 (창원군 북면 신촌리)

마금산과 천마산이 마주치는 창원군 북면 신촌리에 위치하며 약 500년전 조선 초기 때부터 자연 용출되어, 목욕하고 마시면 만병 통치한다고 알려져 많은 피부병환자들이 몰려들어 법석을 떠니 이곳 주민들의 생활에 지장을 주어 주민들이 온천 맥을 묻어버렸다. 약 50년전 일제 시대에 마산에서 병원을 경영하던 일본인이 그 말을 전해듣고 발굴하여 오늘에 이르며 수온이 약 45℃이며, 성분은 철, 아연, 마그네슘 등이 함유되어 변비, 당뇨병, 신경통, 관절염 등에 특효 하다.

 

마산

학이 날아갈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무학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마산은, 신라 때는 굴자군 합포현으로 불리다 조선 태종 때는 창원 1662년 조선 현종 때 마산으로 개칭, 1949년 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기후 좋고 물맛이 좋아 국립결핵 요양소가 있으며, 고려시대 몽고 군이 일본군을 정벌코자 이곳 마산에 진을 쳤을 때 군마의 음료수로 사용하고자 판 몽고정 우물이 유명하며, 물맛이 좋아 일제시대부터 청주를 빚는 양조장이 많아, 멀리 만주가지 공급되었고, 기금도 무학소주가 널리 알려졌으며,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왜간장을 만들어 몽고정의 이름을 따서 몽고 간장이라 부른다. 또한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이곳 시민들의 기질로, 4·19학생의거의 시발지가 되었으며, 가고파를 지으신 노산 이은상 선생님과 어린이로부터 할아버지까지 불려지는 고향의 봄을 지으신 이원수 선생님이 이곳 출신 문인이다.

 

돝섬

돝섬의 지명은 저도 또는 월영도로서, 돼지가 활개치는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돼지의 옛말인 돝섬이라 부르며, 옛날 신라시대 때는 고은 최치원 선생께서 마산 댓거리에서 말을 타고 돝섬에 뛰어와, 말을 단련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가락국 왕이 사랑하는 공주를 잃어버려 군사를 풀어 찾아보니, 무학산 정상에 어느 노파의 피리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군사들이 공주를 모셔가려고 하니 공주가 힘껏 뛰어 지금의 돝섬으로 달아나니 임금은 곧 군사를 보내 섬을 아무리 찾아도, 공주는 보이지 않고 한 마리의 돼지만 꿀꿀대고 있었다. 임금은 공주가 돼지로 변신하였다 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막은 후 돼지의 먹이를 넣어주며 슬픈 나날을 보냈다 하여 돝섬이라 부른다하며, 동물원 및 유기시설, 수영장이 있으며, 연속 공연되는 서커스의 관람은 보는 이들을 옛날 향수에 젖게 한다.

 

수출 자유 지역

바닷가 쓸모 없는 갯벌을 매립, 52만평의 대지에 외국의 유명한 기업을 이곳에 유치, 값싼 우리의 노동력과 숙련된 기술로 제품을 만들어 전량 외국으로 수출하는 특정지역으로서 1970년 착공하여 미국, 일본 등의 외국기업체 90여 개가 전자, 기계, 섬유, 정밀기계를 만들고 있다.

 

창원공단

기후가 온화하고 지반이 견고하며, 교통이 편리함과 동시에 좋은 항만시설을 갖춘 이 공단은 총 부지 1,470만평으로서 정부가 중화학 공업정책의 일환으로 건설되어 산업기계, 정밀기계, 전기기계 기타 관련 부품 등 전략적인 주요부분에 걸쳐, 국제 규격의 기계공장을 집중적으로 유치시켜 기술의 집약화를 통한 투자효과의 극대화와 기계류 수출의 전진 기지화를 이룩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국내에서 제일 큰 창원공단은 재래식 공단과 달리 주거문제, 교육 연구 시설, 생활환경 문제를 포함한 배후도시를 건설 60만 인구가 선진국형 도시에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조성하였고, 공단 내 중앙 도로는 우리 나라 직선 도로로서 제일 긴 12.5㎞나 된다고 한다. 1980년 4월 1일 창원시가 되었으며 부산에 있던 경남도청이 창원시로 이전되어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진해시

해발 566m의 장복산으로 둘러싸인 군항과 벚꽃의 도시, 바다를 진압한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진해시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첫 승리를 거둔 옥포만을 끼고, 바둑판처럼 도시 구획이 되어, 우리 나라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인 진해시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이 대륙 침력의 근거지로, 이곳에 군항 시설을 하였으며 1931년 읍이 되었고, 1955년 시로 승격, 용감한 무적 해군의 요람이기도 하다.

 

군항제

1952년 4월 13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북원로타리에 동상을 건립, 통제부 주관으로 추모제전을 매년 거행하였는데, 1963년 군, 관, 민의 화합을 다짐하기 위하여 군항제로 발전, 매년 벚꽃이 피는 4월 초순부터 보름간, 통제부 및 사관 학교를 일반에게 개방하고, 민속경연대회 가장행렬 등 많은 행사가 펼쳐져 전국의 많은 관광객이 이곳에 모여들며, 진해시의 벚꽃은 1931년부터 시가 일원에 심어져 왔으며, 1966년 이곳 출신 재일 동포 편수개씨가, 만여 그루를 기증하여 심었고, 그후 매년 계속 심어와 지금은 약 8만여 그루가 전 시가지와 장복산 등에 심어져, 만개하면 온 시가지가 벚꽃 속에 묻혀 붉게 물든다.

 

제황산 공원

해발 90m의 제황산은 일년 계단이라는 365계단을 올라 정상에 서면, 진해 전 시가지가 보이며, 진해 탑이 우뚝 서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일본이 노·일 전쟁에 승리 승전기념탑이 있었으나 1956년 철거하고, 군함의 마스트를 상징한 높이 28m의 진해 탑을 세웠다.

 

충무학섬 (천연기념물 231호)

통영군 도산면 도선리 소재 이 섬은, 원래 개나리, 진달래가 만발해 꽃섬이라 불리던 무인도인데, 1968년 길조인 백로와 왜가리가 몰려와 학섬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은 백로와 왜가리 약 천여 마리가 4월경 날아와 10월경이면 따뜻한 고장을 찾아 떠나며, 충무를 오가는 길손들에게, 소나무 위에 눈이 온 것처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옛날 아주 먼 옛날, 광도면 안정리 벽방산의 봉우리가 떨어져 날아가는 것을 부엌에서 밥을 짓던 한 여인이 엉겁결에 부지깽이를 들어 부엌문을 두드리자, 날아가던 산봉우리가 첨벙 바다에 빠져 이 섬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충무시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천연의 양항 충무시는 옛날에는 가배량수라 불리다 서기 1593년 7월 15일 선조임금때 충청, 전라, 경상 3도 수군 통제영을 여수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초대 통제사에 이순신 장군이 되었으며, 1931년 읍으로, 1955년 통영 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충무공의 얼을 받들기 위해서 장군의 시호를 따라 충무 시로 개칭 오늘에 이른다.

 

굴양식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선과 많은 섬들이 방파제 역할을 하여 물이 호수와 같이 잔잔하며 맑고 깨끗해 굴양식에 좋은 환경이 되어, 1962년 투석식으로 처음 시작, 1964년 본격적으로 수하식으로 양식, 연간 약 2만톤 정도를 생산, 미국, 일본 홍콩 등지로 수출하여 약 200억 정도의 외화를 획득하여 어민소득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려수도

1968년 12월 31일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전라남도 여수에서 경남 충무까지 이르는 약 300리 뱃길을 말하며, 5개시 7개군, 2개읍, 48개면을 포함 11개의 유인도 253개의 무인도가 펼쳐지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경치가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격파한 곳곳의 유적지와 함께 절경과 역사를 함께 관광할 수 있는 곳이며, 한려란 한산 섬의 한자와 여수의 여자를 따서 한려수도라 한다.

 

남망산 공원

해발 80m의 작은 산으로서 충무공원이라 불리기도 하며, 벚나무와 노송이 우거진 이 공원을 오르면, 한려수도의 절경과 충무 항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곳 정상에 오르면 통영군민과 거제군민의 성금으로 1953년 우리 나라 최초로 충무공의 동상이 세워져, 옛 대첩지인 한산도를 지켜보고 있고 동상 옆에는 이은상 선생이 글을 지은 한산 대첩비와 충무공의 시비가 있다.

 

충렬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서(서기 1606년) 선조 39년 왕명으로 7대 수군통제사 이운용이 세운 사당겸 소원으로서 사적 236호로 지정되었으며, 경내에는 명나라 황제가 장군의 공을 찬양하며 보내 온 명조 팔품 즉 도독인 참도, 곡나팔, 독전기, 호두령패, 귀도, 홍소령기, 감소령기 8가지가 보물 40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전국의 서원과 사당을 철폐시킨 대원군도 이곳 충렬사에는 명산 서해, 욕일 보천이란 글을 내렸으며, 충렬사 현판은 조선 18대 현종 임금의 사액이며, 또한 당시 우의정 이항복이 짓고 송시열이 쓴, 통제사 충무 이공 충렬 묘비란 비가 보존되고 있으며, 주차장 옆에는 가뭄에 물이 마르지 않고 장마에 불어나지 않으며, 부정한 것이 지나가면 물이 흐린다는 일정과 월정이 있다.

 

세병관

보물 제293호인 세병관은(서기 1603년) 선조 36년 충무공의 후손인 제6대 수군 통제사 이경제 공이 창건, 한산도의 본영을 이곳에 옮겨 293년간 수군의 본영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본부가 되었으며, 수군 36,000명과 548척의 전함을 보유하였다. 추리 나라 목조 건물로는, 경회루와 여수의 진남관과 아울러 건평 185평의 웅대한 건물이다. 세병관이란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글 중 어떻게 하면 장사를 얻어 은하수를 끌어다 피묻은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 다시는 쓰지 않을까 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충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충무운하와 해저터널

한산대첩 때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전법에 크게 패한 왜군 함대가 이곳에 몰렸다 당시 이곳은 본토와 미륵도가 협목으로서 물이 빠지면 걸어서도 갈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얕아, 배가 지나갈 수 없으므로 왜군은 삽과 괭이로 이곳을 파기 시작 도망갈 수로를 찾다가 수없이 죽었다. 그후 이곳을 왜군이 판 곳이라 하여 판도목 또는 송장목이라 부른다. 일제시대인 1931년 미륵도와 충무를 연결하는 착량교라는 조그만 석교가 있었고, 물이 얕아 큰배가 지나갈 수 없어 다리를 헐고 길이 1,420m, 폭 55m, 깊이 3m의 운하를 파고, 당시 일본인들이 다리를 놓으면 임진란 때 자기들의 조상들이 이곳에서 많이 죽어 조선사람들이 조상들의 유골을 넘어 다닌다고 바다 밑으로 굴을 뚫어 길이 461m, 높이 3.5m 너비 5m로 1932년 준공하여 자동차와 사람들이 통행하였는데, 물이 새고 좁아서 1967년 8월 30일 길이 152m, 폭 10m, 높이 18m로 운하 위에 충무 운하교를 가설 통행하게 하였다.

 

미륵도 용화사 (충무시 봉평동)

공해군 9년 성화선사가 군막사 성격으로 정수사를 창건했는데, 폭풍우로 도괴 5년 후 삼장골에 재창하여 천택사라 했다가, 인조 6년 1628년 화재를 당해 3재를 당하자, 성화선사가 미륵산에서 7주야를 기도하니 선인이 나타나 현 위치에 절을 지어 미륵불을 모시면 3재를 면한다는 계시를 받아, 천택사의 잔여 건물을 이건하여 용화사라 개칭하였다. 특기할 문화재는 없으나, 명부전의 지장보살과 시왕은, 약 80년전 함양 영은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고려 중기의 작품이라 전한다.

 

해평열녀 기적비

미륵산 어귀 해평마을에, 금실 좋은 부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동네 사람들과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풍랑에 휩쓸려, 바다에 빠져 행방 불명이 되었다. 아내는 남편의 시체나마 찾기 위해 새끼를 3백발 꼬아 어부를 졸라, 남편 빠진 곳으로 배를 타고 나가서, 갑자기 그녀는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그녀를 두고, 어부들은 집으로 돌아 왔는데 며칠 후 그녀는 남편의 시체와 한 몸이 되어, 새끼줄 묶인 채 죽어서 떠내려 왔다. 죽음으로 사랑을 따른 그들의 시체를, 마을 사람들이 고이 장사지냈는데 그후 이곳 마을에는 나뭇잎마다 해평열녀라고 벌레들이 파먹어 가는, 이변이 일어나 조정에 알리니, 임금은 하늘이 내려준 열녀로, 나뭇잎에 글이 새겼으니, 그 글을  비석에 새겨 세우고 사당을 지어 영혼을 위로하니, 이변이 없어졌으며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다.

 

한산대첩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과, 진주성 혈전과 아울러 3대 대첩의 하나인, 한산도 대첩은 1592년 7월 8일 왜선 70여척을 침몰시켰으며, 7월10일 안골포에서 적선 42척을 격침, 일본수군 9,000명 사망, 400명을 포로로 잡으니 임진란 최고의 대승이 되었다. 왜군은 육전에서는 승승장구하였으나, 수군은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우리 수군에게, 계속 패해서 바다의 통로가 막혀 보급로가 차단, 작전에 차질이 생겼으며, 전의 되찾은 우리 관군과 민병들의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어 진퇴양난에 빠졌다. 학익진 전법이란 학이 날개를 펴 활개치는 함대형을 말한다.

 

한산도 제승당 (사적 113호)

한산대첩에 대승을 거두시고, 1593년 7월 15일 한산 섬에 수영을 옮겨 제승당을 짓고, 군사를 훈련시키며 무기를 만들고, 소금도 만들며 밭을 갈아 스스로 군영을 운영하면서, 수루에 올라 충정 어린 유명한 시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을 지으시니 이때 춘추 52세였다. 1592년 2월 26일 모함으로 억울하게, 이 섬을 떠날 때까지, 3년 8개월 동안 삼도 수군을 지휘하여 한 척의 적선도 남해를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1597년 7월 16일 원균이 패하여 도망치며, 제승당에 불을 질러 폐진 되었고 서기 1739년 영조 15년 107대 통제사 조경이 충무공을 사모하여 150년 동안 폐허가 된 한산도에 제승당과 유허비를 건립하였고, 1931년 통영 유림들이 제승당 경내에 이충무공 영정을 모신 영당을 건립, 1976년 정부에서 3억 6천만 원을 들여 정화하여 성역화 하였다.

 

이순신 장군

1545년 3월 8일 조선 12대 인종 임금때, 지금의 서울 인현동에서 부친 이정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고, 32세때 과거 급제 첫 벼슬에 올랐으며, 47세때 전라 조수사가 되어 철갑선의 원조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48세때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거북선을 앞세우고 옥포, 한산대첩 등 크고 작은 싸움에 크게 승리하시고, 52세때 한산도 수루에서 충절의 시한산섬을 지으시고, 53세때 모함으로 파직되어 옥에 갇혔다가 다시 재임명되어 세계 해전사상 유래 없는 전함 12척으로 1백 30척을 격파한 진도 앞 바다 울돌목 명랑해전의 대첩을 거두었으며, 1598년 54세대 왜군은 풍신수길이 죽어, 철군이 시작되어 달아나는 왜선 500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랑에서 크게 격파, 이때 적의 유탄에 겨드랑이를 맞았다. 장군은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 적이 나를 볼까 두렵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발설하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숨을 거두시니 1598년 음력 11월 19일 이른 아침, 우리의 태양 성웅 이순신 장군은 숨을 거두었다.

 

거제대교

1965년 5월 30일 착공하여 1971년 2월 28일 준공, 길이 740m, 폭10m, 통과하중 50톤

 

거제도

우리 나라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서, 1895년 군으로 승격하였으나, 1914년 통영군과 통합 39년을 보낸 다음, 1952년 거제군으로 복군 되었다. 산악성 도시로서 주민들은 대부분 반농 반어에 종사하며, 1971년 거제대교가 완공됨으로 육지 화되었으며, 6·25동란 때는 포로 수용소가 있었고 반공포로 석방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으며, 임진란때 이순신 장군이 왜적과 처음 전투를 벌여 왜선 26척을 격파한 옥포 만에는 대우조선과 삼성조선이 건설되어 대형선박을 만들어 외국으로 수출, 많은 외화 획득을 하고 있으며 거제도 어업 중심지인 장승포항의 경치와 바다의 금강해금강의 절경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대우 옥포조선

1973년 10월 11일 대한 조선공사가 착공하고 1978년 대우가 인수하여 1981년 10월 17일 준공, 총 공사비 3,275억 원을 드렸으며, 세계 최고의 골리아스 크레인 높이 104m, 폭 206m, 자체무게 6,000톤,  900톤의 무게를 91,4m까지 들어올릴 수 있으며 페인트칠만 하는데도 2억6천7백만 원이 들며, 크레인을 만드는데 130억 원이 들었다고 한다. 또한 세계 최대규모의 도크는 면적 2만 1천평 길이 530m, 폭 131m, 높이 14.5m, 공사비가 311억 원이 들었고 백만톤급 배를 만들 수 있으며 서울운동장 축구장 7.5배의 크기이다. 종업원 수가 13,000명, 총 부지가 140만평이다.

 

해금강

거제군 동부면 갈곳리 앞 바다에 위치한, 이 섬은 갈도라고도 부르며 약초가 많이 서식해 약초 섬이라고도 부른다.

약 3만 6천 평의 작은 섬이지만, 기암 괴석이 파도와 바닷바람에 오랜 세월 다듬어져 천하 절경을 이루어 강원도 해금강과 흡사하다 하여 거제 해금강이라 부르며, 수평선 위에 일출과 낙조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을 이룬다.

 

부곡온천 (창녕군 부곡면 거문리)

우리 나라 최고의 온천인 부곡온천은 옛날에는 이곳에 온정리라는 지명만 있었고, 조그만 옹달샘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 때문에 농사가 잘 되지 않았으며, 겨울에는 아낙들의 좋은 빨래터였던 곳을, 1972년 11월 전 재산을 털어 온천을 찾아 헤매던 신현택시가 이곳을 발견 시추한 결과 75℃의 유황온천을 개발, 당시 이 부근사람들만 사용하였는데 구마고속도로 개통과 국민 관광지로 지정, 전국에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75℃의 고온으로 계란을 넣으면 반숙이 된다하며, 유황성분과 칼슘, 철분 등이 함유 피부병, 관절염, 신경통, 위장병 등에 특효 하다하다.

 

해인사 (합천군 가야면)

1972년 10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해발 1,430m, 가야산 서남쪽에 자리한 해인사는 불교 3보중 법보사찰로서, 신라 40대 애장왕대 순응과 이정 두 대사가 중국 양무제 때 보지공스님이 남기신 유언과 책을 전해 받고, 우두산 지금의 가야산에 들어 초당을 짓고 수도하던 중, 마침 나라에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이 나 백약을 다 써도 차도가 없어 사람을 풀어 고명한 스님을 찾던 중 가야산에 서광이 비쳐, 이곳에 찾아와 두 대사에게 궁에 함께 갈 것을 청하니 두 대사는 가지 않고 오색실을 주면서 실의 한 끝을 궁앞 배나무에 매고 한 끝은 등창난 곳에 대면 나으리라 하여 대신이 돌아가 그대로 하니 병이 낫고 배나무는 죽으니, 애장 왕은 크게 기뻐하며 많은 전답을 하사하시고 국비로 해인사 절을 창건하셨다. 해인이란 이름은 화엄경에 해인삼미에서 딴 것으로, 삼라만상이 잔잔한 바다에 비치듯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의 정심 가운데 과거, 현재, 미래 법이 모두 명랑하게 나타나는 경지를 뜻한다 한다. 또한 이곳에는 국보 32호인 팔만대장경과 국보 52호인 장경각이 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군신항하가 온힘을 기울려, 자작나무를 거제도 등지에서 가져와 3년간을 바닷물에 담그고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말려 만들었으며, 총 81,258장으로 한 장의 크기가 세로 24㎝, 가로 69㎝, 두께 3㎝로 처음에 강화도 선원사에 두었다가, 서기 1398년 조선 태조 7년 이곳 가야산 해인사에 옮겨 오늘에 이르며, 신라의 대 석학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말년에 이곳 가야산에 들어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옛날 해인사 부근 마을에 할머니가 혼자 외롭게 살았는데, 하루는 길 잃은 강아지가 집에 들어오니 자식 삼아 손자 삼아 3년간 고이 길렀더니 3년 후 큰 개가되어 사람말로 할머니에게 이야기하기를, 저는 본래 용궁의 왕자인데 큰 죄를 지어 용왕님의 노여움으로 개가되어 3년간 이승에 나가 살게 되는 벌을 받았는데, 할머니께서 저를 잘 돌보아 주시어서 무사히 오늘 용궁으로 들어갑니다. 용왕님께 말씀드려 며칠 후 할머니를 용궁으로 초청하겠습니다. 하고 사라져 버렸다 과연 며칠후 왕자가 나타나 할머니에게 오늘 용궁으로 모시고 가면 용왕님이 선물을 하실 것이니 금·은 보화를 갖지 마시고, 해인이라는 구슬을 달라고 하라 시켰다. 왕자의 옷깃을 잡고 있으니 할머니는 펑 소리와 함께 용궁으로 들어갔다. 용왕은 큰 잔치를 베풀어 할머니를 위로하며, 우리 왕자를 잘 돌보아주신 할머니에게 은혜를 갚고자 선물을 할 터인 즉 무엇이든 말하라 하니, 미리 알고 간 해인이라는 구슬을 달라고 하였다 왕은 크게 곤란해하였으나 약속인지라 해인을 주며, 이 보물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보배중의 보배로 나쁜 일에 쓰이면 큰 재앙이 있으니 좋은 일에만 쓰라고 일러 이승으로 보내니 할머니는 사는 동안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다른 사람 손에 구슬이 들어가면 나쁘게 쓰여질까 두려워, 아무도 모르게 가야산 어느 곳에 해인을 깊이 묻어버리고 세상을 떠나니 지금도 가야산 어느곳엔가 해인이 있으련만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합천 다목적 댐

1도 2군 5면 29개 동이 수몰된 이 댐은 길이가 472m, 높이 96m의 콘크리트 중수식 댐으로 하루 10만 1천 2백60㎾의 전기를 생산, 년간 37만 배럴의 유류 대체 효과를 얻어, 백억원 상당의 외화를 절약할 수 있으며, 7억9천만 톤의 저수량으로 마산, 차원, 울산 등지에 생활 용수와 공업 및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다목적 댐이다.

 

진주

교육의 도시이며 관광의 도시인 진주는 신라 때는 청주 또는 강주로 부리다가 서기 994년 고려 성종 임금대 진주로 불리었고, 1896년 경상 남·북도로 나누면서 경남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가 1925년 4월 1일 부산으로 도청이 옮겨갔으며, 1949년 8월 15일 시로 승격 오늘에 이른다.

 

진주성

남강변에 위치한 읍성으로서 1592년 임진 왜란 때, 인근의 성이 모두 왜군에게 함락되었음에도 목사 김시민이 용감히 싸워 성을 지키니, 곡창 호남지방의 침입을 저지 왜군의 사기를 꺾었으나, 1593년 6월21일 평양에서 명군에게 참패한 왜군이 후퇴하여 영남 일대에 장기 주둔하기 위해 전년의 F 배를 설욕코자 10만 대군으로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자, 이에 대응하여 죽기로서 싸웠으나 중과 부족으로 6월 29일 성을 함락 당했다. 이때 병마 우도 절도사 최경희, 의병장 김천일 등 군, 관 민 6만 여명이 모두 장렬히 전사하여 임진왜란 3대 대첩이 되었다.

 

촉석루

촉석루 하면 논개, 논개 하면 촉석루가 생각나듯  도도히 흐르는  남강면에 위치한 이루는 남한 3대 루의 하나이며, 6·25전에는 국보 276호였다. 고려 23대 고종 때 관찰사 김광기가 진양성을 축성할 때 남쪽 수비처인 남장대로 세워 전란 때는 이곳에서 장수가 군대를 지휘하였다.

수백 년을 흐르는 동안 몇 차례 중수하였으나, 6·25때 불타 없어져 축대만 남은 것을 진주 향토 문화재를 되찾으려는 각계각층의 재건 의욕으로 고적 보존회를 조직, 1956년 4월 착공하여 1960년 5월에 구화 7,2000만 환을 들여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주논개

주논개는 1574년 7월 7일, 계내면 대공리 주촌 부락, 주달문의 딸로 갑술년 갑술일 술시에 태어나(개해 개달 개시에 태어나) 사람을 낳은 게 아니라 개를 낳았다고 논개라 이름지었는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숙부 집에 살았는데, 숙부가 빚을 많이 져 김풍원에게 민며느리로 보내자 어머니와 함께 당시 장수 현감인 최경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여 최경희의 도움으로 현감 집에 기거하다가 최경희의 첩이 되어 임진란이 일어나자 진주 병사가 된 부군을 따라 진주성에 와서 왜군에게 패하자, 기적에 이름을 올려 촉석루 잔치에서 왜장 게야우라로꾸스께를 끌어안고 남강물에 투신하니, 그때 나이 19살이었다. 그 후 1786년 이곳 사람들이 장수읍에 그의 넋을 기려 추모비를 세우고 1954년 의암사를 세워 매년 음력 9월 9일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의암

1593년 군, 관, 민 6만 명이 항전 끝가지 싸웠으나, 중과 부족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이대 병마 우도 절사인 최경희도 전사, 부군을 따라 진주성에 와서 싸움을 도왔던 주논개는, 비록 연약한 아녀자지만 국난을 극복하고 남편의 원수에게 복수할 것을 결심, 승전에 들뜬 왜병들이 촉석루에서 잔치를 열고자 1,000석의 술과, 소 천마 리와 기생들을 징발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진하여 기생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 촉석루에서 주연이 베풀어지자, 기생으로 변장한 논개는 술이 거나하게 취한 왜 적장을 남강 아래바위로 유인, 손이 풀릴까봐 손가락마다 반지를 끼고 적장을 끌어안고 깊고 푸른 남강 물에 투신 순사 하니, 후에 정대룡이란 사람이 논개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투신한 바위에 의암이라 새김으로 의암 바위가 되었으며, 매년 6월 29일 논개 제사를 지내며 추모제가 열린다.

 

진양호

진주시 귀곡동, 진양군 대평면과 나동면에 걸쳐 남강을 가로막은 이 댐은 공사비 68억 8천만 원을 투입, 1962년 4월 착공하여 1969년 10월에 완공, 제방길이 975m, 높이 21m, 수위 37.5m이며, 하루 12,660㎾의 전기를 발전하고 있고 댐의 완공으로 홍수 조절 및 진주, 삼천포 지역의 생활 용수와 공업 용수, 농업 용수를 공급하는 젖줄이 되었으며, 진양호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팔각정과 일년동안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상징한다는 365계단 그리고 2천여 그루의 벚꽃, 각종 유기 시설이 마련되어 진주시민의 사랑을 받는 유원지가 되며 특히, 이곳의 낚시터는 씨알이 굵어 강태공들이 많이 몰려온다고 한다.

 

산청군 단성면 문익점 목화 시배지

이곳은 서기 1363년 고려 공민왕 때 이곳 출신 문익점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오는 길에 붓 대롱에 목화씨를 넣어 가지고 와 이곳에서 처음 재배하여 우리 나라에 무명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의류 혁명이 일어났다.

 

곤양 다솔사 (사천군 곤명면 용산리)

방장산 다솔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전 연기 조사께서 처음 남방으로부터 해양불교를 입수하여 방장산에 토굴을 짓고 수도하였고, 서기 503년 지증왕때 영악대사가 초창 영악사라 부르다가 서기 636년 선덕왕 때 자장율사가 중건하여 다솔사로 개명하였고, 1971년 12월 30일 부임한 박한남 주지스님이 기금 불사를 하던 중, 부처님 탱화에서 석가 세존 오색사리와 세계 최초의 쌍사리 108과를 발견 대보궁의 불보 사찰이 되었으며 전국 많은 신도들이 사리친견 시주하여 높이 23m의 7층 건물 규모의 적멸 보궁탑을 익산 미륵탑을 본 따 동양 최대 규모로 만듦.

 

남해대교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을 연결하여 우리 나라에서 세 번째 큰 섬 남해도를 육지 화시킨 이 다리는 한려 수도를 가로지르는 동양 최대의 적교입니다. 공사비 18억 7천 2백만 원을 들여, 1968년 5월 1일 착공하여 1973년6월 30일 준공되었고, 길이 660m, 너비 12m, 높이 60m로서 교각이 없으며 5㎜의 철사줄 2,128개를 꼬아서 만든 지름 25.8㎝의 로프 줄로 연결되었다.

 

남해 충열사

1958년 11월19일 이른 아침 남해 노량 앞 바다 관음포에서 풍신 수길의 죽음으로 퇴각하는 왜적 선을 추격 대승을 거두시는 와중, 적의 유탄으로 전사 장군의 유해를 아산으로 옮기기 전, 임시 매장했던 곳으로 돌아가신 36년 후 서기 1632년 조선 인조때 김여민 고승후, 두분의 발의에 의해 초사를 짓고 비를 세웠고 그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1973년 사적 233호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장군의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참배한다.

 

관음포(이락사)

사적 232호인 이락사는 관음포 바로 앞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노량 해전으로 순국하여 돌아가신 지 234년 후인 1832년 그의 8대 손 이환권이 유허비를 세워 장군의 충절을 추모하였으며, 이락사란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곳이라는 뜻이다.

 

남해읍

남북 100리 동서 80리의 이 섬은 해발 785m의 망운산, 681m의 금산 등으로 지세가 높으며 유자, 비자, 치자 3자가 유명하며 못 배운 이 없고 걸인이 없으며 도둑이 없다는 남해는 조선 고종 32년(서기 1895년) 군이 되었으며 1개군 8개 면으로 오늘에 이르며, 조선시대에는 명문 학자들이 많이 유배되어 교육에 힘썼고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 선생도 이곳에 유배되었다. 산과 바다가 아름답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

호는 서포,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익겸의 아들로 태어나 1665년 29세대 등과, 1686년 대제학가지 벼슬을 하였으나 숙종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남해도로 유배되어 귀양지에서도 숙종을 참해 시키기 위해 사씨남정기를 짓고, 나이 많은 어머니를 위해 구운몽을 지었으며, 56세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남해 금산

해발 681m의 금산은 아름다운 바다와 기암 괴석이 어울려 소금강산이라 불리며 쌍흥문 사선대, 좌선대 등 금산 38경과 보리암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은 너무도 아름다우며, 우리 나라 바다를 끼고 있는 사찰로서 3대기도처인 양양 낙산사, 강화도 부문사와 아울러 금산 보리암은 신라 30대 문무왕(서기 683년)때 원효대사가 절을 짓고, 산 이름을 보광산 절 이름을 보광사라 하였는데, 이성계가 임금이 되려고 처음 백두산에 들어가 기도하였으나 산신이 반대하여 지리산에 들어갔으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마지막으로 남해섬 보광산으로 와서 제단을 차리고 100일 동안 정성껏 기도하고 조선을 건국하여 태조 임금이 되니 보광산의 은혜에 보답코자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 아름답게 빛내주기로 명령을 하였더니, 한 신하가 큰산을 비단으로 싸는 것은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며 세월이 흐르면 비단이 썩어, 더러워져 일시적이지 영원하지 못하오니 비단금자를 써서 산 이름을 금산으로 지어주면, 대대손손 비단으로 감싼 산이 될 것입니다. 신하의 말을 들은 이 태조가 감탄하며, 보광산을 금산으로 바꾸었으며 보광사는 이 태조가 100일 기도를 하여 새 왕조를 창건하였다 하여, 조선 18대 현종 때 보리암으로 개명 오늘에 이르며 법당에는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관음 보살상은 향나무로 만들어 졌으며,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씨 부인이 인도에서 모셔 왔다고 하는 3층석탑과 이성계가 기도하였다는 제단이 있다. 또한 인근에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물결이 잔잔하며, 수온이 약 25℃로 적당하며, 반달 같은 해수욕장을 뒤로 송림이 우거져 한 폭의 그림 같은 상주리 해수욕장이 있어 금산과 더불어 많은 피서객이 모여든다.

 

남해 금산 상사바위 전설

옛날 전라도 여천 땅에 천하절색 미인 처녀가 살았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에 모든 총각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중에 한 총각이 상사병에 걸려 죽었다. 죽어서 큰 뱀이 되어 꿈에도 그립던 처녀에게 올라붙어 칭칭 감고 떨어질 줄 모르니 처녀 집에서는 온갖 방법을 다하여도 뱀이 물러가지 않아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하루는 처녀 어머니가 밤에 꿈을 꾸는데 산신령이 나타나 남해도 금산에 올라가 정성으로 기도하면 뱀이 물러가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어머니는 딸과 함께 금산 정상부근 넓은 바위에서 일주일을 정성껏 기도하였더니 뱀이 스르르 몸을 풀고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기도했던 넓은 바위를 상사암이라 부르며, 지금도 짝사랑하는 사람이나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는 사람이 이곳 상사바위에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하며 주위에 석간수라는 약수가 있으며, 상사암은 한려수도의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보리암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쌍계사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화개면 화개 장터에서 쌍계사까지 10리 벚꽃은 진해 벚꽃 다음가는 벚꽃터널로서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 물과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화개천의 계곡이 너무나 아름다운 이곳에 자리한 쌍계사는 서기 723년 의상대사의 제자인 3법사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의 정상(머리)을 안치하고, 절을 짓고 옥천사라 하였는데 그후 신라 46대 문성왕 2년(서기 840년) 진감 국사가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오면서 죽로차 종자를 어렵게 가져와 주위에 심고, 크게 중창하고 쌍계사라 고쳐 불렸으며, 절 입구 큰 바위에 신라의 대석학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로 썼다는 쌍계 석문이 눈길을 끌며, 경내에는 국보 47호인 진감국사 대공탑비 보물 380호 진감국사 부도, 보물 500호 대웅전 등의 문화재가 있으며 물일 폭포 또한 절경이다.

 

칠불암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서기 97년 가야국 김수로왕의 10왕자중, 넷째 왕자부터 막내 왕자가지 7명의 왕자가 출가하여 가야산에 입산 3년간 수도하고 서기 101년 이곳 지리산에 들어와 운상원을 짓고 수도하여 서기 103년 8월 15일 7왕자가 모두 성불하여 칠불사라 불려지며, 7왕자가 수도하고 있을 때 수로왕 부부는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이곳에 드렸으나 허왕후 오빠인 장유화상이 수도하는 아들의 불심을 어지럽힌다고 꾸짖어 보내니 만날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이곳 부근에 궁을 짓고 기다린, 하루는 장유화상이 네 아들들이 성불했으니 오늘은 만나 보라고 하므로 왕후가 머뭇거리니 연못을 보면 만날 수 있다하여 연못을 바라보니, 황금빛 가사를 걸친 일곱 아들이 성불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곳이었다. 이러한 전설로 이곳의 지명은 김수로왕과 왕후에 관련된 이름이 많다. 왕이 머물렀다는 범왕부락, 왕비가 머물렀다는 천비촌, 아들을 본 연못을 영지, 허왕후가 어두울 때 도착하여 어름어름 했다고 어름골이라 불려 지금도 마을 이름으로 사용된다. 또한 이곳은 아자방으로 유명한데 1976년 지방 문화재 144호로 지정되었으며, 세계 건축 사전에 기록되었다는 아자방은 신라 52대 효공왕때 구둘도사로 불린 운공 선사가 벽안당에 구둘을 놓으면서 아자형으로 축조한 것이 유명한 아자방이며, 방고래가 8m에 달하는 이중 온돌 형태의 아자방은 한 번에 일곱짐 정도의 나무를 3개의 아궁이에 불을 때면 49일간이나 방이 따뜻하며 스님들이 좌선하다 마비된 발을 낮은 데로 놓으면 금방 저린 발이 낫는다는데 아깝게도 여·순반란때 사건으로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2년 5월 31일 4천 8백만 원으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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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1